한국교회와 목회 세습

by 세반연 posted Jul 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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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목회 세습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과)

 

다시 이런 모임에 나온 것이 저에게는 새삼스럽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아시듯이 운동과 관련한 모임에는 그동안 별로 관여하지 않고 오랫동안 거의 숨어 지내셨습니다. 조제호 국장의 강권 때문에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만 12년 전에 세습반대운동을 할 때 기윤실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광림교회 세습이 그 때 이슈화되었습니다. 자료집에 실린 글은 지난 3월 한길사에서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내면서 한 부분으로 실은 글입니다. 12 년전에 했던 세습반대운동의 과정과 정신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당시 건강교회운동본부를 맡았던 박득훈 목사님을 중심으로 고세훈 교수, 최근에 인수위에 들어간 이승종 교수, 오세택 목사님 등이 주축이 되어 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도 그 때 아마 처음 기윤실 운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광림교회는 2001년 봄에 결국 세습을 결행했고 기윤실의 세습반대운동도 그 뒤에 멈추었습니다. 2002년에는 건강교회운동본부가 해체되고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발족했습니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1987년 기윤실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뒤 지난 25년간 겪었던 일 가운데 가장 저에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 뒤로 저는 다시 이제 공부하는 일에만 전념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세습반대운동이 계속 이어졌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최근에 세습반대운동이 다시 시작되어 저도 지도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1. ‘세습이라는 현상

목회 세습은 세습반대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12년 전 보다 지금은 더욱더 보편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저는 받고 있습니다. 세습이 이제는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각 교단마다 노회나 시찰을 통해서 2000년 이후 지금까지 목회자가 교체된 교회에 아들이나 사위가 담임목사직 승계를 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를 해보면 쉽게 통계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통계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저가 듣고 보는 바에 따르면 대형교회뿐만 아니라 중소형교회들의 세습이 훨씬 더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제는 거의 당연한 것처럼 시행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세습이라 부르든 승계라고 부르든, 아니면 지난 여름 한기총 성명서에서 주장했듯이 청빙이라 부르든 간에 아들이나 사위가 담임목사직을 물러 받는 현상이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가 알기에는 역사가 오래 된 교회에서는 세습이 일어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회일수록 연세 많은 장로들의 목소리가 높고 담임목사가 전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습이 발생하는 교회는 대부분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과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한국 개신교가 팽창할 시기, 젊은 목회자의 몸으로 거의 혈혈단신 개척을 했던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도시의 경우에 대부분 작은 상가 건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들은 교인 수가 늘어나고 헌금의 액수가 증가하면 좀 더 큰 상가로 옮겨 더 큰 교회로 자라났습니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에는 여러 사역자들의 헌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담임 목사의 설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의 경우에는 담임목사 개인의 기량에 따라 교회가 자랐고, 교회가 자란 만큼 담임목사의 발언권이나 결정권은 비례해서 커졌습니다. 당회와 재직회가 있지만 중요 결정은 사실상 담임목사의 의중에 달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회는 담임목회자의 의중을 알아서 그것을 지원하고 보충하고 실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임무처럼 되었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마치 회사를 창업한 창업주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형교회가 아니라 중소 규모의 교회라 하더라도 그 교회가 담임목사가 개척한 교회라면 담임목사의 권한은 그렇지 않은 교회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헌신이 없이는 유지할 수도 없고 자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낌없이 내어 놓은 교인들에게는 인사나 재정과 관련해서 별 권한이 없습니다. 문제는 장로들입니다. 담임목사가 개척한 교회일 경우 장로들은 대부분 담임목사가 세운 사람입니다. 한국교회 내에 흐르는 정서를 보면 담임목사가 세운 장로들이 담임목사의 뜻을 거부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목회 세습의 경우도 만일 담임목사가 원한다면 장로들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의견을 따릅니다. 공동의회에 그 안을 내어 놓았을 때, 이 경우도 한국교회 정서상, 대부분이 당회에서 결정한 것을 승인해 줍니다. 목회 세습은 (1) 담임목사 (2) 교회의 장로들 (3) 교인들, 그리고 (4) 세습을 받는 당사자(아들이나 사위 또는 친인척), 이 사자(四者)의 협력이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일 담임목사가, 또는 장로들이, 또는 교인들이 공동의회를 통해서, 또는 세습을 받는 목사가 반대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재 문화, 현재 정서는 이 네 당사자가 손잡아 세습을 성사시키기 쉬운 상황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담임목사가 장로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담임 목사와 장로들이 교인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물러 받는 목사에게도 그만한 능력이나 자질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인들의 회의를 쉽게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깥사람들이 보기에 교인들로부터 신뢰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담임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목사직 승계를 공동의회에서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을 보면 교인들에게 분명 인지적 착각이나 혼란이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세습을 가능케 하는 교회 문화와 의식

한국교회를 보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현재 형성되고 실행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좋을 것입니다. 무엇이 현실 그대로인가를 가려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차라리 현재 드러난 그대로’, ‘현상 그대로보자고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몇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서술이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술해 놓고 보면 당연한 것 같은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이것이 교회인가?” 라는 물음을 갖게 하는 현실을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 교회는 시간과 힘과 돈을 내지만 정신적인 보상 외에는 달리 보상이 없는 교인들(이른바 평신도들’)과 교회가 일터가 되어 사례를 받는 전임 사역자(이른바 성직자’)로 구성됩니다. 이 가운데 담임목사가 역시 중심에 있습니다.

 

(2)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예배, 성경 공부, 구역모임, 제자 훈련, 전도 훈련, 봉사활동, 회의 등 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이런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 받습니다. 이 가운데 예배가 중심에 있습니다. 예배는 목사의 전문 영역이므로 예배 중심은 자연스럽게 목사 중심을 초래합니다.

 

(3) 담임목사의 주요 임무는 예배 인도, 설교, 심방을 하는 것이고 교인들의 주요 임무는 예배 및 각종 모임 참석, 교회 봉사, 헌금, 전도에 열심을 보이는 것 정도로 통상 이해됩니다.

 

(4) 목사로서의 성공적인 삶은 교인 수를 많이 늘리는 것, 다시 말해 많은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5) 교인의 성공적인 삶은 교회 잘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안에서 봉사활동 잘 하고, 전도 열심히 하는 데 있다는 생각을 목사나 교인들은 대체로 공유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람들은 신앙 좋다고 말합니다.

 

종합해서 보면 오늘 한국교회는 역시 예배 중심이고, ‘목사 중심이고 신앙생활 또한 교회 중심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부할 정도로 많이 지적되지만 교회 생활과 세상 생활, 신앙생활과 세속 생활이 이분화 되어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세상 생활, 세속 생활보다는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 한국 개신교 교인들의 삶의 방식이라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장사하고, 아이 키우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밥 먹고 일하고, 투표하고, 공부하는 일을 신앙생활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교회 안에 머물 뿐 그 힘을 세상 속에서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는 가운데는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목회자 승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목회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양떼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목회에는 교인의 수, 주일 헌금의 액수, 교회 건물의 유무, 노회나 교단에서의 위치, 이것들이 목회자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세워가는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일로 등장합니다. 더구나 사모님이 열성이 있는 분이면 목회자와 사모님이 함께 교회를 일구어 나가고 교인들을 챙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2)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교회 재산은 하나님의 재산이지만, 어느 새 교회는 목사와 사모님의 교회가 되고 교회 일은 목사와 사모님이 함께 주축이 된 가업(家業)이 되어 갑니다. 교회 재정이나 인사에 담임목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재량권이 많이 주어질수록 교회가 사유화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3) 목회자 승계와 관련해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물러날 시점이 가까이 다가오면 그렇게 애써 일군 교회를 남에게 넘겨주기 보다는 아들이나 사위가 신학을 하거나 이미 목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아들이나 사위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목회 세습은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따라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상식도, 세상의 비난도, 성경적인 관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마치 힘써 가꾸어 온 가게를 자식에게 물러주듯이 애써 가꾼 교회를 자식에게 물러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립니다.

 

3. 교회, 목회, 목회자

한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시지요. 신학적으로 보면 (1)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전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주교도 교황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고 모두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유화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유지하고 양육하고 키우기 위해서 사역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사역자 가운데 하나가 목사라는 직분입니다(4). 목사를 세운 목적은 성도를 세워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의 키의 정도에 이르는 것입니다. 목사도 성도의 한 사람으로 부름 받아 특별히 이 일을 하도록 세움 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도 이와 같은 목표에 동참하는 사람임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지역 교회에서 성도를 세우기 위해 목사를 선정할 때도 성도를 세우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사의 아들이나 사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지역교회의 목회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하여 목사와 성도들이 다 같이 범사에 그리스도처럼 되어가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나 동등함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분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비움낮아짐의 삶으로 부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런 삶을 통해 삶을 다시 세워가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묻는다면 자신이 따르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분을 따라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삶을 온전히 회복하는 사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속에서 체험되고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성경에서 보는 목회, 교회, 목회자의 승계 정신과는 너무나 먼 현실이 아닌가요?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는 별로 관계없는 교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가정, 학교, 기업, 정부 조직처럼 사회 속에 있는 여러 제도,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의 제도, 하나의 기관으로 분명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제도와 기관 또는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대로 돌아갑니다. 이 방식이 다름 아니라 우리가 세상이라 부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크 엘륄의 표현을 따르자면 기술적 사고입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수단을 강구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교회와 목회자가 설정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는 교회 성장입니다. 제자훈련, 전도폭발, 이 모든 것들은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세습도 교회 성장, 아니면 최소한 교회의 현상 유지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존재론적 원리는 스피노자가 코나투스 에센디’(conatus essendi)라고 부른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물러나는 목사는 목사대로, 교회 장로들은 장로대로, 교인들은 교인대로,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욱 더 크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로 키우고자 하는 욕망이 현상 가운데 하나로 표출된 것이 목회 세습의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단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세기 한국 역사는 한마디로 비참한 역사였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다시 찾은 나라조차 몇 년 뒤에는 전쟁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이들을 부모로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생존만큼 중요한 가치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과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경쟁을 하자면 남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건물에 교회가 몇 개나 들어서 있으면서도 서로 형제자매로 동류의식을 갖기보다 경쟁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은 단순한 생존, 단순한 자기보존에만 머물지 않고,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상승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힘을 더욱 가질 수 있고 자기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로와 집사들도 근대사의 경험과 함께 형성된 생존 욕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서는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쟁의 초토화를 경험하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오직 생존을 목표로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가장 앞장 선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러,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세상의 논리와 삶의 방식을 이용해서 성공을 거두고자 한 사람들이 교인들이고, 장로들이고, 목회자들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요? 그래서 교회도 결국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보다 오히려 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세습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까요?

 

4. 맺음말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예컨대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려보지만 현실은 교회도 한국사회를 가동시키는 동일한 방식에 따라 운영되고 유지되고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가 가르치고 선포하고 보여주었던 삶의 방식과는 관계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추구되고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요? 목회자를 청빙하는 과정이나 목회자상에 대한 이해나 의사 결정하는 방식이나 과정 등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미 익숙한 것들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지, 오히려 세상은 스스로 변혁하고 수정하고 개선해 나가지만 교회는 더욱 더 그 이전의 세상 방식을 따르고 있지 않은지,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보고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교회란 이 땅에서 어떤 존재이며, 목사는 누구이며, 신자가 누구인지,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삶의 원천으로 믿고 고백하는 삼위 하나님은 누구인지, 삼위 한 분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통치자로 고백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다시 처음부터 묻고 숙고해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지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세습은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가 되고, 교회가 사업체가 된 결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발생한 하나의 결과요, 현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습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이보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가 더 깊은 곳에, 더 내밀한 곳에,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저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고 토론자로 참석한 분들의 말씀에 저도 함께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출처 : 대중 좌담회 '교회세습, 무엇이 문제인가' 기조강연문
주최 :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일시 : 2013년 1월 8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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