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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국교회여! 이 땅의 기독청년들이여!

고세훈
고려대 경제행정학부 교수
기윤실 건강교회운동본부 운영위원
 

포럼이 시작되기 전부터, 포럼장은 광림교회측 사람들로 이미 상당부분 점거되어 있었다. 얼마전 한기총 세미나에 참석했던 나로서는 이것이 크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 이번에는 훨씬 큰 규모로, 그리고 보다 조직적으로 -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한기총 세미나에서는 그래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의 발표와 토론은 - 비록 그것이 (세습)반대의견에 대해서는 고성과 야유로, 그리고 자기측 입장을 옹호하는 발언에 대해서는 ‘눈물겨운’ 아멘의 열창으로 얼룩지기는 했을지언정 -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기회마저 없었다. 포럼은, 벽두부터, 그것의 본질과는 무관한 질문으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고, 2시간 넘게 그대로 만신창인 채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자가 누차 공지한 대로, 세습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겐 포럼이 진행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논리와 설득을 포기하고 구태여 집단적 히스테리와 몸싸움의 무리수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도저히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실 처음부터 이번 포럼은 한기총 주최 토론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구상되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기윤실과 복상포럼이 공동주최한 ‘세습반대’를 위한 포럼이었다. 그것은 세습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세습반대의 논리와 입장을 다시 확인하며, 세습반대를 위한 범교단 연대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각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것이었다. 이번 포럼의 순서가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진 두 진영 간의 논쟁을 통해 결론을 도출한다는 ‘토론’이 아닌 패널‘토의’로 이름붙여진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1부의 패널참가자들의 면면에서도 그 점은 명백하게 들어나거니와, 더구나 2부 모임의 내용은 ‘‘세습반대’를 위한 연대기구 발족’과 ‘‘세습반대’와 교회갱신을 위한 기도회’라고 명시되어 있다. 원래의 구상에도 불구하고 기윤실/복상포럼은 광림교회측에 여러차례 패널참가를 권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권고는 광림교회측의 무응답, 수락, 번복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기총 토론회가 형식적으로 찬반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그 내용에서는 지극히 편파적으로 토론을 진행시킨 것과는 달리, 이번 기윤실/복상포럼은 표면적으로는 세습반대를 위한 포럼이었으면서도 사실상 참석자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허용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대비(對比)라 아니할 수 없다. 패널참가를 둘러싸고 그들이 보였던 방관과 거부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포럼 자체를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들은 성공하였는가.

주최가 마음에 안들면, 그 자리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구태여 참석했으면,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주어진 시간에 자신의 다른 입장을 당당하게 개진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통상적 포럼에서 상식적 청중이 보일 수 있는 참여방식일 터였다. 그런데, 광림교회측 사람들은 패널토의자로의 초청도 마다하고, 스스로 택했던 방청의 자리마저 또한 스스로 팽개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애초부터 포럼 자체를 무산시키는데 혈안인 사람들에게 ‘청중’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 즉 ‘듣는 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도대체 방청객이 주최측 대표의 인사말을 걸고 대표자격을 운운하는 것은 무슨 생트집인가. 그날 이만열 교수는 이 포럼을 주관했던 복상포럼의 대표로서 인사말을 한 것이다. 이교수가 언제 한국교계를 대표해서 그 자리에 섰다고 선언했는가. 아니면 주최의 대표를 방청객이 결정하는 포럼도 있는가. 참으로 유구무언의 황당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광림교회측이 ‘유인물로 준비한’ 10개에 가까운 질문항을 ‘현장에서’ 돌발적으로 제시하고 ‘공식적 즉답을 요구하며’ 벌인 난동은 또 무슨 무례이며 해괴한 어거지인가. 기윤실을 포함한 모든 책임있는 단체의 공식적 입장표명이란 그렇게 쉽사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광림교회측이 진정으로 답변을 원했다면, 질문을 고심하여 문서화하는데 걸린 시간만큼 답변 또한 문서화하는데 드는 시간을 인정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패널의 시종을 지켜본 후 미진한 부분에 한하여 다시 질문하는 여유를 보였어야 했다. 더욱이 광림교회측은 세습과 관련된 기윤실 최초의 내부토론을 반복하여 문제삼으며 기윤실과 토론참가자들을 지속적으로 매도하였다. 이미 누차 밝힌대로, 당시 기윤실의 내부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들은, 모든 사안에 대한 첫 토론이 언제나 그렇듯이, 개인적 의견 수준에서 자유롭게 제시된 것이었다. 그것이 거듭된 입장조율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이 <담임목사직 세습반대를 위한 성명서>일 터이다. 따라서 첫 토론회에서 간담회 형식으로 오간 말들을 두고 시비를 거는 자체가 포럼이 있기까지 진행된 그 많은 대화들을 무위로 돌리는, 적절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행태였다. 그 다음은 거론하기도 민망한 수순(手順)이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의 정체모를 덩치들이 방자하게 들락거리고, 갑작스런 정전과 더불어 포럼을 알리는 강단의 대형 현수막은 한 무뢰한에 의해 순식간에 뜯겨져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나가라, 나와라, 내려와라, 죽자사자의 친숙한 소리들이 허공을 뒹굴고, 책자와 팜플렛이 날고, 멱살이 잡히는 아수라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것은, 정확히, 집단적 맹목과 광기였다. 이것이 한국 최고의 지식인들이 집결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광림교회의 본모습인가. 참담하고, 섬찟하다. 무례와 소동이 도를 더해가는 만큼, 이성적 대화나 설득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포럼은 지극히 초보적인 상식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끝났고 말았다.

기윤실의 세습토론방을 잠시나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세습찬성의 논리가 얼마나 허약하고, 허약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얼마나 자극적이고 뒤틀린 말들, 막무가내의 인신공격이 가상공간이 주는 익명성을 활용하여 난무했던가를 쉽사리 기억한다. 이번 포럼은 그간 사이버 뒤에 숨어서 비논리, 비본질의 유치하고 음흉한 언어폭력을 일삼던 사람들의 모습을 마침내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셈이다. 물리적 난동이야, 차마 애틋하여, 논외로 치자. 광림교회는 이제 수많은 상식인들을 식상하게 만드는 그간의 언술방식을 거둬들여야 한다. 광림교회 사람들이 그동안 사이버 안팎에서 보인 태도는 자신(의 논지)을 풍부하게 만들므로써 상대를 설득하기 보다는, 논점과 무관한 인격적 가학(加虐)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곧 대화의 장을 막막하고 무익한 인신공격의 장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그 때마다 범람하는 설익고 뒤틀린 말들은, 말하는 당자의 배설(排泄)엔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조차 곧 사라질 자기기만일 경우가 허다하며, 반복될수록, 당자에겐 상처뿐인 열패감, 자기모멸적 내상(內傷)만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그것이 자신의 논지를 오히려 형편없이 추락시킬 것은 자명하며, 그 때 토론의 장은 열려있되,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의 눈엔, 이미 게임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이제 세습에 대한 나의 개인적 입장과 ‘내가 보는’ 기윤실의 관점을, 주로 광림교회측의 문제제기에 기대어, 뭉뚱그려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윤실은 세습이란 용어를 포기한 적이 없다. 기윤실은 단 한차례 공식적으로 세습이란 단어의 사용을 포기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럼이 개최될 즈음에는 세습을 세습이라고 부르자고 새삼 내부의 입장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세습은 그 안에 일정한 내용을 이미 담고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사용자의 입장이 또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세습이라는 단어가 부와 권력 혹은 영향력이 혈연으로 엮어진 선후대 사이의 이전(移轉)을 의미한다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기윤실이 몇몇 대형교회에서 목하 진행되는 상황을 세습이라 규정했을 때, 기윤실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세습이 가지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세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안하고는 개인이나 단체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직결된 문제이며, 누가 이래라 말라 관여할 수 없는 기본권에 관계되는 사안이다. 따라서 그것이 세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또한 말하는 당자의 자유이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러한 사람이나 단체의 입장에 폭력으로 관여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우리가 그렇듯이,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도 그들이 폭력적으로 개입할 권리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습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을 용인하듯이, 그것이 세습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입장을 용인해 달라. 특별히 나로서는 세습을 세습 아닌 어떤 것으로 부르라는 강요를 도무지 참을 수 없다. 물론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사회적 개념이다. 그러면 우리의 이러한 입장이 광림교회에 해(harm)를 끼쳤는가. 광림교회가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광림교회는 먼저 광림교회의 세습이 한국교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것인지 면밀히 검토했어야 옳다. 다음에 보게 되듯이, 몇몇 대형교회의 세습이 한국교회 전체의 영적 진운(進運)이라는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에 닿아있다고 확신하는 한, 나로서는 세습이라는 단어를 포기할 용기가 도무지 없다. 세습이란 단어가 그렇게 불편한가. 세습을 하지 않으면 된다. 대한민국은 모든 문명사회가 용인하는 초보적인 기본권의 행사 조차 폭력으로 저지해도 무방한 나라가 아니다. 광림교회는 더 이상 유치한 단어유희를 빌미로 폭력도 불사하는 맹목적 광기를 거둬야 한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개명된 지역에 가장 개명된 사람들이 모인다는 교회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2. 지금까지 기윤실은, 세습문제와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또 공식적으로, 단 한차례도 특정교회를 지칭하여(targeting) 거론한 적이 없다. 세습관련 토론과정에서, 만일 특정교회가 지칭되었다면, 그것은 세습을 옹호하는 세력의 제발저리기에서 먼저 비롯된, 그리하여 그에 대응하는 세습반대를 주장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입장진술의 차원이었다. 기윤실은 개인의 대외적인 의견표명 조차 불허하는 권위주의적 단체가 아니다. 그러나 세습의 심각성을 논하면서 세습의 주요 진원지인 대형교회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방도가 있는가.

3. 세습은 한국교회가 그간 누적시켜온 악습의 집적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나는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세습이 가지는 반성경적, 반복음적 성격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미 기윤실과 복음과 상황의 토론방에서는 왜 광림교회의 경우 세습이라 이름할 수 있는가, 왜 세습은 비성경적이고 반복음적인가, 왜 세습은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의 누적적 증시인가, 왜 대형교회인가? 왜 대형교회의 세습이 한국교계에 가져올 부정적 파장이 폭발적일 수 밖에 없는가, 왜 기윤실은 이 문제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가, 왜 이 때 거론하는가, 요컨대, 왜 세습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가 등등에 관해서 너무나 분명하고 진지한 입장들이 올라와 있다. 따라서 나는 원론적이고 구태의연하며, 다분히 형식논리적인 - 즉, 탈맥락적이고 탈역사적이어서 ‘그럴듯한 외양 갖추기’에 온통 짓눌려있는 - 틀에 갇힌 질문과 답변들에 이제 식상해 있다. 다만 나는 세습이 어느날 문득 불거져나온 우연한 사건이 결코 아니며, 한국교회가 그간 누적시킨 허다한 문제들 - 예컨대, 성장지상주의, 물량주의, 개교회주의, 기복신앙, 강단권독점, 담임목사의 전횡 등 - 하나하나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악습들을 통째로 그 정점에서 응결시키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니 오히려 세습은 특정교회 당회장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이 당대를 뛰어넘어 혈연적 후대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계승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행의 시작, 곧 또 다른 적폐(積弊)의 기원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4. 세습은 공간적으로도 특정교회의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 나의 가슴을 말할 수 없는 비탄으로 짓누르는 것은, 세습이 지닌 역사적 성격 때문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우려하는 것은 현재 세습을 추진하는 몇몇 교회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한국교회 전체에 몰고올 일파만파의 파장에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부정적 파장이다. 광림교회를 포함한 이 땅의 대형교회들은,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교회를 선도할 책임이 있는 대표적 교회들이다. 이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이 땅의 수많은 중소형교회들이 이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 ‘어쩔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들이 세습이 개교회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변하려면, 최소한 한국교회의 현실이 ‘문제없다’는 것이 어느정도 전제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야말로 입만 열면 선교와 전도를 외치는 자들이 고려해야 하는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소수 대형교회의 왜곡된 관행이 급속히 침투, 확산될 정도로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던 세습이 갖는 역사성이란, 곧 한국교회가 세습 이전에 이미 세습을 위한 정지(整地)작업을 ‘착실히’ 추진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세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이미 끝낸 상태일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단 세습이 몇몇 대형교회들을 통해 정당화될(불이 당겨질) 때,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한국교회사회를 덮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준비안된 사회에서 부패는 또 다른 부패의 연쇄(連鎖)를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습이 관행화되는 사이 교회마다 빚어질 엄청난 갈등과 소요, 그리고 그 와중에 한국교회가 치뤄야 할 영적 대가는 더 이상 첨언을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세습이 갖는 심각성은 현재 세습을 주도하는 대형교회들이 한국교계에서 차지하는 막대한 위상과 그것이 한국교회에 만연된 누적된 악습을 토양으로 하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다.

특히 후자는 교회 밖의 한국사회를 들여다 보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거니와, 우리는 도처에서 한국교회가 맺은 열매들을 그야말로 ‘풍성히’ 맛보고 있다. 예컨대, 신문과 방송에 부정과 독직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명사’들의 적지않은 수가 장로급의 교회 직분자들임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개되고 공개되지 않은 채, 목회자가 연루된 크고 작은 범법 사례들 또한 만만치 않다. 웬만한 직장과 거리에서 부딪치는 장삼이사의 상당수가 다 교회집사인 실정이니, 집사급 얘기는 아예 접어두는 것이 편하다. 집사도 장로도 목사도 다 사람이요 죄인일 뿐이라고 강변한다면 할 말이 없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라 했지만, 우리는 교회의 역할에 관한 성경말씀을 거론하는 것 조차 낯뜨거운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빛과 소금의 선도(善導)는 커녕 우리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어둠과 부패를 지레 선도(先導)하는 범죄자들을 일상적으로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주일마다 수없이 선포되는 복음은 어디 있는가, 이미 죽었는가. 그 많은 설교들과 성경공부들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의 영혼과 육신을 울(鳴)리고 위로하는가. 종교를 가진 한국인(46.9%) 가운데 개신교도의 비율(44%, 카톨릭까지 합한 기독인은 60%)이 불교도의 비율(40%) 보다 오히려 높다는 최근의 한 조사[‘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가 보여주듯이, 사회에 대한 기독인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이제, 기독교적 양심이 아니라, 일반론적으로도 수긍되는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 더욱이 사회지도층 인사 가운데 70% 정도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통계를 접하면, 그리고 이들이 교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직분을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문제’의 절박성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와있다. 한국사회를 개탄할 때마다, 한국교회의 현상황에 대한 위기의식, 그리하여 교회갱신의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물론 한국교회도 선배 신앙인들의 소중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히 계승되기도 전에, 이미 한국교회는 심각히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습이 일반적 관행으로 고착되는 것을 막을만한 교회 밖의 어떤 문화적 견제장치 또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이 점에서 근대적 서구사회가 정착시킨 합리적 제도들과 관행들을 부러워 한다. 작금 운위되는 탈근대나 해체 혹은 이성과 주체의 죽음 조차도 실은 근대라는 역사적 성취 위에서 비로서 가능한 역사적 개념들이다. 물론 서구사회에도 세습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습이 우연을 넘어 일반적 관행으로 정착되기엔, 저들의 사회는 견고하게 상식적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는 다르다.

반복하거니와, 한국교회는 세습이라는 파행조차 참으로 매력적인 선택으로 간주될만큼 말할수 없이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다. 특히 나는, 우리의 부패한 사회와 부패한 교회문화를 떠올릴 때마다, 세습이 몰고올 전후방효과(前後方效果)를 떠올리며 전율한다. 앞으로 세습을 꿈꾸는 선대 목회자는 자식에게 물려줄만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한국의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얼마만한 각고의 노심초사를 기울일 것이며, 그 와중에 한국교회의 부패구조가 어떻게 심화될지는 불을 보든 뻔한 일이다. 교회가 선대목사들에 의해 세습의 노골적 대상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이것을 세습의 전방위적 효과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제 수많은 무인가 신학교들마다 선대의 담임목사직 세습을 꿈꾸는 2세의 ‘부름받은 자들’로 차고 넘치는 날 또한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한국교회의 미래에 몰고올 파장, 그것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이것이 세습의 후방위효과이다. 설사 특정교회가 우연히 ‘유능한’ 2세 목회자를 배출시켰다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한 일본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어느 집단에서 선대의 경영능력을 가진 자손이 규칙적으로 나올 확률은 제로이다. 이것이, 한국의 재벌체제가, 가만히 놔두어도, 2대, 3대가 아니라면, 4대, 5대에는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소수의 ‘우연’ 가능성에 기대어 그러한 희망사항이 몰고올 전체의 ‘필연’적 추락이 방치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 너무 억울하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유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박사학위 받고, 말 잘하는 것은 세속의 기준일 뿐이다. 이른바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 때론 외적인 조건도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목회(pastoral care)를 위해, 그것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겸손과 충일에 비한다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들인가. 그런데도 목회자의 내외적 조건들은, 모든 다른 요인들을 일거에 초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핏줄이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그 도저한 병적 집착(執着) 앞에서, 또 얼마나 쉽사리 조작되고 막무가내로 과장되기 십상인가. 한국적 상황에서 세습은, 요컨대, 무자격을 번듯한 자격요건으로 얼마든지 둔갑시킬 수 있는 참으로 신비한 괴력(怪力)이며 사술(邪術)인 것이다. 세습의 전후방 효과는 피차를 악순환적으로 상승시키며, 그 와중에 한국교회의 후세대가 짊어져야할 짐의 무게는 갈수록 버거워 질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적폐(積弊)는 개선난망(改善難望)이라 했다. 이 모두는 세습이 몇몇교회의 ‘특수’한 문제로만 환원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한국교회 전체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떠안아야 할 우리모두의 ‘보편’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몇몇 재벌의 왕조적 경영체제가 어떻게 한국경제 전체, 그리하여 한국민 전체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는가를 상기하면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더욱이 그것은 재벌의 물적(物的) 소유권의 세습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영적(靈的) 진운에 직결된 문제이다. 세습이 몇몇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도무지 방치할 수 없다. 그럴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5. 따라서 교회내부의 세습이 세상에 ‘폭로’됨으로써 한국교회 선교의 길이 막혔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은, 과연 한국교회가 전도가 부족해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난 반세기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마침내 일천만 교인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맡거나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과 ‘기독인 됨’과는 사실상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M. 로이드-조운스 목사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미 보았듯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하는 이 나라의 교회와 사회는 지금 어떤 상황에 와 있는가. 제발 걱정마시라. 세습 이전에도 세상은 한국교회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창밖엔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실내의 바로미터는 ‘날씨쾌청’(fair weather)을 가르킨다면, 우리는 곧 바로미터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절체절명의 과제는 교회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충만한 잔(盞)은 스스로 넘치기 마련이며, 전도는 철저하게 열매이다. 따라서 전도를 빗대 세습과 같은 잘못된 관행들을 묵인하는 일은 오물을 내지르고도 바지 벗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앉아서 뭉개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악취는 진동하기 마련이다. 한국교회가 안고있는 만성적이고 치명적인 질병은 호도되고 방치된 채, 밖으로 전도(傳道)만을 외치는 것은 문제의 본말을 가리는 기이한 전도(顚倒)일 뿐이다. 과연 전도의 길을 가로막는 자, 진정 이제 누구인가. 한국교회는 이 쯤에서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지 않은 독재자는 역사상 없었다. 그가 독재자의 오명을 벗고, 독재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길은 독재를 포기하는 것 뿐이다. 교회가 세상에 드러내서 떳떳치 못한 관행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 내부에서 먼저 성토되어야 마땅하다. 교회의 기준은 세상의 잣대를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의 의미를 우린 다른 방식으로는 도무지 유추해 낼 수 없다. 교회가 자정의 능력을 상실한 순간, 외부로 부터의 질타는 너무도 당연하며, 그것은 교회가 세속의 안목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 놓여있음을 말해 줄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의 교회를 재벌기업과 비유하면서도 스스로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더 이상 시험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잘못된 평화, 맹목적인 평화(peace at all costs), 곧 평화로 위장된 무지와 혼돈과 탐욕과 소외의 그 위장을 벗어버려야 한다. 한국교회가 진실로 아파해야 한다면, 그 때는 바로 지금이다. 나는 세습이라는 고통을 통해 한국교회의 고질적 질병의 증세를 드러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광림교회는 광림교회가 취한 방식 때문에, 이미 자신의 설득력을 상실했다. 광림교회는, 세습이 진정, 교인들 일반의 뜻이라면, 세습의 정당성을 문서와 토론회 등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홍보했어야 옳았다. 예컨대 세습이 그렇게 당당하다면, 기윤실과 복상포럼에 세습을 놓고 토론회를 개최하자고, 왜 먼저 제안하지 못하는가. 기윤실이 폭력적인 단체라서 그런가. 이번 포럼에서 보였던 광림교회 교인들의 폭거가 단지 ‘일부’ 신도들의 자발적인 과잉충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교회측은 기윤실/복상포럼에 정식으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교회차원에서, 즉 교회의 공식적 의사결정을 거쳐서,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우린 차마 믿고싶지 않을 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제 나는, 그날의 현장을 속수무책의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았을 우리 기독청년들에게 어쩔 수 없이 희망을 걸고자 한다. 그들의 눈물의 기도 속에서 나는 용서와 소망의 하나님을 보았다. 나는, 머뭇대며 주저하다가 어느덧 기성세대의 관행에 젖고 그 한 축에 편입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만한 유산을 그대들에게 남긴 것에 대해 다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땅의 기독청년들이며, 복음은 소멸과 부활에 대한 신비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눅2:34) 과연,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더 이상 버려질 수 없는 것들만을 엄격하게 남겨놓은 극한에 먼저 서라”고 들려주고 싶다. 그대들의 영혼 전체를 들어 먼저 절망하되, 끝끝내 절망에서 시작하되, 매일매일 충일(充溢)해 가는 사랑의 성숙을 터득하라. 그 때 그대들은 확인하게 되리라. 사랑은 언제나 정의에 의해 완성되며,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또한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그리하여 복음은 또한 행동인 것이다. 이 땅의 기독청년들이여, 회개없는 화해, 정의없는 평화를 기꺼이 사양하라. 사랑과 연민과 더불어 공의와 분노 또한 잊지마시라. 무엇보다 다시 복음에 굳게 서서, 나의 세대가 잊거나 잃어버렸을 분노를 회복하기 바란다. 부디 게으름을 떨치고 경건의 모양과 상투적 요설(饒舌)로 위장한 부자의 오만과 지식인의 허위 그리고 집단의 광기를 분별해 내도록 하라. 복음에 대한 갈증과 열정이야 말로, 참을수 없이 가벼운 사유와 유희적 현실인식 그리고 “활동하는 무지”만이 판치는 이 어두운 시대에, 그대들이 지녀야 할 최우선의 덕목이리라. 그대들만이 희망이다. (尾)
 

출처 : 기윤실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 자료집](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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