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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가 바로 서야 교회가 산다
: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에 즈음하여
 
이승종
서울대 교수
기윤실 건강교회운동 운영위원
 
 
최근 일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과 관련하여 비판과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공론화는 해당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병폐의 해소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으로서 매우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1) 세습의 부당성에 대한 논의 (2) 부당한 세습이 용인되는 원인에 대한 진단 (3) 세습의 치유방안으로 나누어 논의하고자 한다.


1. 세습의 부당성

첫째, 세습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세습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혈연에 대한 집착이라는 인간적 욕심에 따라 목사개인이 추진하는 일이다. 세습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추진하는 일이 아니라면 이는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거든 민주적 원칙과 절차에 따라 교인의 진정한 총의에 따라 담임목사직 승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하여 해당교회에서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승계가 이루어졌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교회내 권위적 지배구조하에서 현 담임목사가 은퇴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담임목사의 자식에 대한 공정한 승계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둘째, 세습은 절도행위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에 대하여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목사는 교회의 구성원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문가적 입장에서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을 뿐이다. 즉,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손에게 교회의 운영권을 배타적으로 승계시키는 것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하므로 명백히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자기의 집이 아닌 남의 집을 가리켜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저집에 살아볼래”라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며, 양식있는 자손이라면 그러한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셋째, 세습은 약자를 차별하는 불의한 일이다. 작금 목회자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실에서 많은 목회지망생들이 목회지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목회자 모집공고가 나면 많은 목회지원자가 쇄도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인의 아들이라는 연고를 바탕으로 독점적 지위에서 담임목사직을 승계한다는 것은 그 자체 불의한 일이다. 돈을 내고 교수직을 얻은 자가 떳떳하게 교수직을 수행할 수 없듯이 목회자 역시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아들이라는 혈연관계에 지원받아 목회직을 승계하였을 경우에 떳떳하게 목회를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더욱이 약자의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할 목사가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많은 목회지망자들의 기회를 박탈하면서 목회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것은 상대적 약자를 차별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 불의이다. 그러므로 독점재벌이 비난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담임목사직을 독점하는 세습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넷째, 세습은 교회의 병폐를 잘 드러내는 전형이다. 뒤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권위적 지배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목회자의 잘못된 의사가 평신도에게 전달되고 평신도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교회가 타락해가고 있다.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이러한 증후의 대표적 전형이다. 즉, 목회자의 그릇된 욕심이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정당한 비판없이 신자의 굴종을 도출하여 수용·추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습에 대한 반대는 세습문제의 해결을 위하여만 아니라 교회의 병리현상 전체에 대한 치유를 위하여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2. 세습이 수용되는 원인: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

어떻게 교회에서 절도행위, 차별행위, 사리사욕행위의 성격을 갖는 부당한 세습이 추진되고 또 용인될 수 있는가? 그 원인의 핵심은 교회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권위주의적 또는 억압적 지배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목사는 평신도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고, 평신도는 마치 전제군주의 신하와 같이 저항없이 묵종함에 따라 교회내부에서 권위적 지배구조가 형성되며 이에 따라 세습과 같은 부당행위가 유효한 저항없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에서 권위주의적 지배구조가 형성될 수 있는가?


1) 목회자의 지배권력
 
교회내의 권위적 지배구조는 일차적으로 목회자가 평신도에 대하여 갖는 다양한 권력에서 비롯된다. 목회자가 평신도에 대하여 행사하는 권력은 세가지 형태를 망라한다.

첫째, 가시적 권력이다. 명백히 관찰될 수 있는 권력으로서 목사-장로-집사-일반 신도로 이어지는 위계에 의한 영향력 행사를 말한다. 교회의 운영권한은 당회장 일인에게 과도히 집권화되어 있기 때문에 목회자가 행사하는 가시적 권력은 크다. 보조교역자와 당회원은 대개의 경우 목사의 조력자의 수준을 넘지 못하며 평신도는 간헐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별다른 저항없이 지시에 따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는 가시적 권력을 발동하여 세습을 추진하고 세습반대의사를 압박할 수 있다.

둘째, 비가시적 권력이다. 비가시적 권력이란 특정 의제가 공식적인 의사과정에 상정조차 되지 않도록 작용하는 권력을 말한다. 세습의 문제에서도 이러한 권력이 관찰된다. 즉, 일부 평신도가 갖고 있는 세습반대의사가 공식적 의결과정에 상정되지 못하는 경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목회자가 반대의사의 거론을 사전에 제압하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명시적인 압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이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즉, 평신도가 세습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지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해보았자 현 구도하에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거나, 문제를 제기했을 때 돌아올 부정적 반응이나 불이익을 미리 예견하여 스스로 의제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여하튼 지배권력을 가진 목회자에게 불리한 의제는 공식적 또는 가시적인 의사절차에 상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비가시적 권력을 통하여 목회자의 세습기도는 유효한 저항없이 추진되게 된다.

셋째, 잠재적 권력이다. 이는 평신도의 의식구조에 미치는 지배권력으로서 효과적인 교화(indoctrination)를 통하여 평신도로 하여금 정당한 판단을 할 능력을 잃도록 작용하는 권력을 말한다. 실제로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목회자에 대한 순종, 교회내의 질서와 위계구조의 인정, 비판적 태도에 대한 비난, 무조건적인 화목의 가치 등을 평신도에게 교화시킨다. 그 결과,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당성을 판단하기보다는 목회자의 결정에 맹종하거나 충성경쟁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잠재적 권력은 그 효과에 있어서 비가시적 권력에 비하여 우월하다. 비가시적 권력은 때로는 불만이 공식적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만 한다. 또는 공식적으로 의견을 제출해봐야 소용이 없거나 반대의견을 제출한 자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잠재적 권력의 경우에는 그러한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평신도는 그릇된 교화를 통하여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거나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내도록 길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잠재적 권력을 통하여 목회자의 세습기도는 저항없이 지지되는 것이다. 잠재적 권력은 이렇게 강력하면서도 종교의 속성상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권력이다. 즉, 목사는 은연중 평신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이에 따라 무지한 신도의 맹종을 별도의 비용없이 효과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상과 같은 다양한 권력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효과적으로 평신도에게 전달한다. 세습기도도 이러한 권력방식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목회자는 세습을 추진함에 있어서 교회의 위계적 계층제를 활용하고 있으며(가시적 권력), 반대의사의 표출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있으며(비가시적 권력),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세습의 정당성에 대한 부당한 믿음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잠재적 권력).


2) 평신도의 대응

이와 같은 목회자의 권력행사에 대하여 평신도가 취할 수 있는 행동유형은 비판, 이탈, 무시, 충성 등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비판(voice) 또는 의견표출이다. 의식있는 일부 평신도는 잘못된 결정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시정을 요구한다. 예컨대, 세습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의무를 행사하는 것이며 교인으로서의 공적의무를 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 이탈(exit)이다. 일부는 불만이 있는 경우, 의견을 표출하기보다는 교회를 옮기거나 배교한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불편함을 벗어나 당장에는 다소의 평안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탈은 이탈과정에 따르는 정신적 부담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하여 해소하고자 하는 사익지향적 방법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셋째, 무시 또는 무관심(neglect)이다. 일부는 문제를 평가하지 않거나, 평가하더라도 무시하고 가볍게 지낸다. 즉, 관객으로 남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인의 모습이다. 문제는 무관심 속에서 부패가 싹트고, 병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이기적인 사적 행동으로서 한계가 있다.

넷째, 충성(loyalty)이다. 목회자의 결정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지지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대개의 경우, 무지에서 비롯된다. 목회자에 대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은 무지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유에서 충성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세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더라도 목사를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거나, 자신의 지위유지를 위하여 충성을 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담임목사의 전횡에 구속되어 있는 부목사와 전도사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담임목사의 부당한 행동에도 충성을 표시하도록 강요받는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네가지 행위가 다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목회자가 갖는 지배권력에 압도되어 평신도의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로 교회 내에서 잘못된 일에 대하여 비판을 하려는 평신도는 많은 부담을 감수하여야 한다. 사안을 파악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해야 한다. 타인으로부터 소요를 일으키는 자이며 사랑이 부족한 자로 지목받기 십상이다. 목회자로부터 배척당하고 심지어는 강단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그러나 은근히 비난받기도 한다. 싫으면 떠나라고 압력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여러 가지 불편을 감수하고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교인이 많을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다수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탈, 무시, 충성전략을 택하여 부담을 축소하고 이익을 확대하게 된다.


3) 권위적 지배구조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목회자가 갖는 지배권력, 그리고 이에 대한 다수 평신도의 묵종을 근간으로 하여 교회내부에 권위적 지배구조가 안정적으로 구축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교회의 병폐가 생기고, 일단 생겨난 비리는 정당한 비판의 결여로 인하여 치유되지 않고 고착되며 이에 따라 교회는 점점 더 부패하게 된다.

세습이 그 부당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교회에서 수용되는가하는 문제 역시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설명된다. 즉, 세습이 추진되고 용인되는 것은 세습이 부당한 것을 알더라도 권위적 지배구조하에서는 세습추진에 대한 유효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목회자의 세습추진에 대하여 유의미한 저항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소위 지식인층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대형교회에서조차 세습에 대한 자체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고 있는 현실이 입증하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세습을 추진하는 교회내부에서의 비판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고 해서 세습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세습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의 크기는 세습의 정당성 여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교회의 지배권력구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세습에 대하여 반대목소리가 작은 것은 세습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지배권력구조의 억압적 영향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적할 것은 이와 같이 대다수의 평신도가 세습과 같은 명백한 잘못까지 용인하게된 현상에 대하여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많은 목회자가 올바른 신앙과 신학과 양심에 기초하여 평신도를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그들의 치병기복 심리를 이용하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지위를 격상시키는데 골몰하여왔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물론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며 또 다른 많은 목회자는 올바른 신앙교육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인격을 소유한 목회자가 올바른 신앙과 신학에 입각하여 건전한 가르침을 평신도에게 전달하는 경우에는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가 문제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시될 수 있다. 지배구조를 통하여 목사의 올바른 가르침이 평신도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권위적 지배구조는 억압의 기제로 기능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목회자의 인격여부와는 무관하게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가 항존하는 한, 이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죄인이며, 목회자 역시 평신도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부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경우, 중소형교회에 비하여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누릴 수 있는 열매가 크기 때문에 권위적 지배구조는 약화되기 더 어렵고 이에 따라 건전한 목회자라도 타락할 개연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평신도 또는 외부로부터의 유효한 견제가 없는 상황하에서 목회자의 인격에 기대를 거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강조하건대, 교회에서 세습과 같은 부당한 일이 추진될 수 있는 근본적 원인은 목회자의 인격의 수준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권위적 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량한 목회자를 타락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는 결단코 무너져야 한다.

그러면 왜 많은 목회자는 권위적 지배구조를 타파하려하지 않는가? 왜 스스로의 지배권을 축소하고 평신도의 의견표출을 확대하려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지배구조가 무너지는 즉시 목회자가 겪어야하는 불편함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목회자가 지배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토론과 협의를 거치는 민주적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어렵게 되고, 일의 진행에 시간이 더 걸리게 되며, 제기되는 비판과 장시간 소요되는 토론을 인내하여야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물론 목회자가 반드시 부정적인 의도에서 지배구조를 유지하려는 것만은 아니며 좋은 의도로 지배구조를 유지하려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사업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의 확립이 불가피하다거나, 목회자의 권위가 약화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방해를 받는다는 주장 등은 그 예이다. 영성이 강한 목회자일수록 권위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러한 주장 역시 내용적으로 목회자가 평신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잘못이 시정되지 않게 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요컨대, 목회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권위적 지배구조를 쉽게 포기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교회를 타락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첨언할 것은 이와 같은 권위적 지배구조하에서 작용하는 권력은 그 유형을 막론하고 “착취적 권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세습과 같이 부당한 사안에 대하여 행사되는 권력은 평신도의 양심과 신앙을 부당하게 해치고, 불필요한 교회내 갈등을 초래하여 평신도에게 심적 고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명백히 착취적이다. 이렇듯 권위적 지배구조하에서 작용하는 권력이 착취적임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갖는 죄성에서 기인한다. 즉, 인간의 죄성은 우월적 권력을 다른 존재의 행복을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기 보다는 권력자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착취권력의 행사의 온상이 되는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3. 대안으로서의 교회민주주의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세습을 포함하여 많은 교회부패의 근원적 요인이 되는 권위적 지배구조는 타파되어야 한다. 그 대신 교회내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권위적 지배구조를 배척하고 민주적 협력공동체를 건설하지 않고는 세습문제를 포함하여 교회의 병폐를 고칠 수 없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민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의 개인의사가 아닌 다수결을 존중하고 그러면서도 소수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토론을 중시한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교회에 적용될 때, 목회자의 평신도에 대한 권위적 지배는 사라지고 교회의 구성체인 평신도의 인격이 인정되고 존중됨으로써 목회자와 평신도의 자유로운 토론을 바탕으로 한 협력에 의하여 교회는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규모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구약시대로부터도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부락단위에서 성인남자들이 사법, 정치적 결정에 참여한 고대 이스라엘의 공회는 민주주의의 초보적 형태이다. 광야에서 모세의 조역자는 민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왕정시대에도 민의 참여는 이루어져 왔다. 왕의 선출, 회중과 왕의 언약의식 등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지명하신 왕에 대하여도 회중의 정당성 부여행위가 있었다. 신약시대에도 민주주의는 실천되었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의사결정권을 공유하였다. 중요결정은 반드시 공동체의 동의를 얻었다. 개혁교회 역시 사제집단의 지배권의 축소대신 교회, 가족, 시민공동체에서의 평신도의 자율적 책임성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또한 자유를 찾아 조국을 떠난 청교도들 역시 민주주의자의 원형이었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다스려지며 민주주의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 앞에서 평등한 인간들의 뜻을 합당하게 모아가는 절차적 원리일 뿐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면, 목회자의 권위적 지배는 하나님의 부정인 점에서 더욱 문제시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버리고 민주주의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다 잘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 불의하기만 하다면 민주주의가 적용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불의한 자들의 중의에 의한 결정은 그 자체 불의일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의한 속성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만큼 정의로운 속성도 소유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 Reinhold Neibuhr는 “인간의 정의능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불의능력은 민주주의를 필요하게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는 민주적인 협력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민주적 협력체제하에서만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격의없는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보다 잘 파악되면서 일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교회의 부패소지가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세습문제의 해결 역시 교회내 민주주의의 실현 없이 기대하기 어렵다.


4. 교회민주주의의 실현조건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다(백종국). 이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면 매 가정마다 평균 1명의 기독인이 있는 셈이니 교회가 바로서면 곧 나라가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권위주의적 지배구조하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내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교회를 살려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내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를 위하여는 이하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변화, 그리고 매개집단의 지원 및 중재가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신도의 변화가 중요하다.


1) 목회자가 변화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목회자의 인식변화가 요구된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많은 권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목회자가 변화하면 교회의 많은 문제가 단시일 안에 해소될 수 있다. 세습문제 역시 목회자가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포기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득권층인 목회자들이 좋은 동기에서든 나쁜 동기에서든 지배권력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습의 경우 “세습이 되어야만 교회가 안정된다”거나, “능력이 있으면 아들이라도 무관하다”는 등 설득력없는 논리를 들어 세습을 강행하는 현상도 기본적으로는 지배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권위적 억압구조를 타파함으로써 가장 불편을 받을 자가 목회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집단이 자발적으로 억압구조를 민주화한다는 것은 가장 소망스럽기는 하지만 실제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특히 대형교회의 목회자일수록 지배권력이 가져다 주는 열매의 달콤함이 크기 때문에 더더욱 지배권력을 포기하려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변화되어야 한다. 고통받는 평신도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신학교육의 정상화, 목회자의 재교육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이 역시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를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지배구조가 가져다 주는 유혹 때문에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집단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이다.


2) 평신도가 바로 서야 한다.

목회자 집단에 큰 희망을 걸 수 없다면, 그 대안은 평신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민의 주권을 존중하는 체제라고 한다면, 교회의 민주주의는 당연히 평신도의 주권적 지위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때 평신도는 주권적 지위에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정당한 개입을 해야 한다. 특히 권위적 지배구조하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목회자의 그릇된 판단에 대하여 정당한 비판의 목소리를 발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부당한 착취권력에 대응하여 평신도들이 정당한 "방어권력(defensive power)"을 행사하여야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를 지킨 브아와 십브라처럼(출1) 각자가 처해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행동은 평신도가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인 점을 깨닫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또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계급적 차이가 아니며 수평적 차원에서의 기능적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점을 깨달으면 가능한 일이다. 즉,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구분에 대한 허위의식만 깨진다면 목회자의 지배권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권력의 발동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방어권력이란 말에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다. 방어권력은 목회자를 배척하기 위하여 행사하는 적대적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를 바로 세우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받들기 위한 정당한 권력으로서 장려되어야할 대상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기존의 목회자에 의하여 지도받는 평신도가 스스로 깨우쳐 방어권력을 발동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즉, 평신도의 변화는 목회자의 변화와 무관한 관계에 있지 않고 그만큼 평신도 스스로의 주체적 변화는 용이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목회자에 대한 기대보다는 평신도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교회의 민주화로 목회자는 불이익을 당하지만 평신도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즉, 평신도는 민주화를 통하여 권위적 억압구조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깨닫기만 하면 평신도의 방어권력이 발현될 수 있고 이에 따라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는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일차적으로 평신도의 주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평신도 내부의 학습 및 교호작용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여기에 의식있는 목회자집단의 지지가 합쳐진다면 상승효과를 얻게 되어 교회의 민주화가 크게 앞당겨질 것이다.


3) 매개권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앞에서 교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평신도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였으나 현재의 지배권력구조하에서 특별한 조치없이 평신도의 각성 그리고 이에 따른 방어권력의 발동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평신도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불가피하게 제삼자의 역할을 인정하게 된다. 즉, 한편으로는 지배자의 불의한 착취를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의 정당한 방어권력을 고무시키는 “매개권력(intervening power)”의 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형교회의 세습문제와 관련하여 기윤실과 같은 사회단체, 종교집단, 언론매체의 개입은 그 목적이 사특하지 않은 한 정당화된다. 이러한 개입은 세습을 포함하여 각종 부패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고려할 때 정당화의 차원을 넘어 시대적 요청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세습을 옹호하는 교회가 매개집단의 개입을 부당한 간섭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내에서 권위적 지배구조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는 착취권력을 비호하는 것으로서 비난받아야 한다.

지적할 것은 매개집단의 개입활동에 대하여 방법론적인 제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세습반대운동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공개기자회견, 피켓팅, 서한발송과 같은 행위에 대하여 과격하고 비성서적인 방법이라 비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교회의 문제는 교회내부에서 조용히 문제생기지 않게 온건하게 처리되어야 하며 그같은 방법이야말로 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세습반대활동에 있어서 방법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방법론보다는 그 매개활동이 과연 약자를 위한 것인가,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인가라는데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과연 온건한 방법만이 성서적 방법인가에 대하여도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도둑들을 나무라실 때 온건하게 타이르셨는가? 아말렉족속의 멸절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온건한 것이었는가? 이러한 지적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역사가 온건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방법의 온건/과격성이 어떠한 활동이 성서적인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에서 문제의 본질에 우선하여 부차적인 방법의 문제를 부각시켜 세습반대활동 자체를 백안시하는 것은 성서를 빙자하여 교회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강변일 뿐이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에 따른 온건한 방법만으로 부패한 기득권층이 물러설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다. 이는 작금 세습반대운동에 대한 해당교회의 가시적 반응이 어떻게 초래되었는가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될 문제이다. 요컨대,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방법론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놓쳐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지적할 것은 매개집단의 개입은 그야말로 중재 또는 지원과 같은 매개적 역할에 한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제삼자의 개입은 평신도의 각성이나 목회자의 각성을 촉구하거나 지원하는 성격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가지 의문은 제삼자의 개입이 목회자와 평신도 중 누구를 우선하여 지원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우선적으로 평신도의 지원에 진력해야 한다. 그것은 매개권력이 기본적으로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자의 착취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문제의 해소를 위한 매개집단의 활동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쓰는 평신도의 입장을 지원하는 편에서야 한다. 이와 같이 평신도에 대한 지원은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의 타파를 위하여도 매우 중요하다. 세습문제의 경우에도 일차적으로 세습문제로 인하여 고통받는 평신도의 입장을 지원하려는 자세의 견지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5. 결론: 평신도가 깨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세습은 불의한 일이며, 교회의 치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가 이 시점에서 교회 내외에 부각된 것은 하나님께서 세습문제의 해결을 포함하여 교회갱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세습문제에 대한 대응노력이 세습문제를 포함하여 한국교회의 전반적 병폐를 개혁하려는 노력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목적과 관련하여 평신도의 사명은 강조하여 지나침이 없다. 과거의 종교개혁이 사제집단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면 오늘의 종교개혁은 평신도의 주도적 노력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은 목회자의 자발적 노력을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변화를 기다리기에 앞서 평신도가 먼저 변해야 한다. 목회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평신도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 이탈했던 이가 돌아오고, 무관심하던 이가 직시하고, 맹종하던 이가 정당한 의견을 표출하여야 한다. 평신도가 깨어야 한다. 평신도가 깨어야 교회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와 대응방안 - 공동포럼
주최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복음과 상황
일시 : 2000년 9월 5일(화) 오후 7시
장소 : 여전도회관 2층 루이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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