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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습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 우리 사회의 구조와 교회 세습-

 

 

박영신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1. 사회학의 눈

 

우리나라에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지고 살아가는 학도라면 모름지기 두 가지 문제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이 학문 세계에 들어서 있는 한 누구든 서구의 사회학자들이 일궈놓은 이론과 연구 결과에 익숙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학문 성과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사회의 됨됨이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 문제로 다가서려는 분석 관심을 지켜가는 일이다. 사회학이 서양의 역사 문화에서 문제로 떠올라 그것과 씨름한 데서 펼쳐 나왔기 때문에 이 학문의 틀에 우리의 문제를 단순 대입하여 해답을 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서투른 짓이다. 서양의 학문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그 학문의 일차 관심은 서양 사회의 문제에 있었다. 그들은 남의 나라가 겪는 문제를 두고 애정과 관심이 담긴 날카로운 비판의 눈으로 따져 들고자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두고 집요하게 파고들어가 그 문제와 맞붙어 싸움해야 할 사람은 우리이고 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무리 변변찮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짜이게 되었고 그것은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겪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고 그 문제를 두고 괴로워하며 눈물 흘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사회학을 하는 학도의 몫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학문 관심에서 우리 특유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교회의 세습 문제를 나의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른 말로,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눈길을 두고 나름 그것과 씨름해온 한 사회학도로서 이 문제의 실체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교회의 세습 문제는 간단히 교회 세습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잉태된 것이다. 교회 세습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교회 문제이고 우리 사회에 번식하게 된 우리식 기독교의 문제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와 떨어져서는 온전히 풀이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아래에서 먼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살펴본 다음, 거기에서 교회가 걸어온 길을 새겨보고 교회의 세습 문제를 뜯어보고자 한다.

 

교회 세습의 문제를 두고 논의하는 자리는 물론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것은 앞서 여러 수준과 차원에서 논의되어 온 바 있다(이 원규, 2009: 45-58). 교회 세습의 문제가 널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앞서 교회 세습이 일어난 그 교단에 속한 신문에서도 이 일을 다뤄졌을 정도이다. 나아가, 이 문제에 대하여 벌써부터 논의해온 여러 글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배우게도 되었다. 그러나 논의란 같을 수 없고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구석이 있는 법이다. 오늘 이 모임도 이 문제에 대한 생각과 배움을 보태고 나누고자 하는 또 하나의 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나는 교회 세습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짜임새와 역사 경험에 비추어 풀이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논지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이 논의의 전제와 바탕이 되는 우리 사회의 짜임새를 두고 앞서 내가 여러 가지 보기를 들어 살펴본 여러 글의 논지뿐 아니라, 더욱 구체스럽게는 교회 세습의 문제에 대하여 내가 발표한 글의 논지에 아래의 논의가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교회 세습 문제가 다른 나라에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나머지 스탠포드대학교의 한 연구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지난 해 봄에 내가 발표한 바 있다(Y. Park, 2012). 아래의 논의는 이와 같이 앞서 내가 발표한 글의 논지 안에 들어서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케 된 교회 세습의 현황을 새삼 길게 적을 필요가 없는 만큼 우리 사회의 짜임새와 교회 세습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집중하여 논하고자 할 따름이다. 어떤 뜻에서는 이러한 사회()학 쪽의 시도가 교회 세습의 문제를 두고 벌이는 토론에 설명의 근거와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 사회의 짜임새

 

오늘의 우리 사회는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체의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서 전개되어 나온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조선 사회의 구조와 과정을 역사 사회학의 눈으로 뜯어보고자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박 영신, 1977/1978; 1978/1978; 1987: 3; 1996: 3).

내가 밝히고자 한 내용을 여기에 다시 자세하게 적을 필요는 없지만 그 알맹이를 말한다면 그것은 효 중심의 유교 가치가 조선 사회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삶 그 자체를 다스려 왔다는 점이다. 유교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부자의 인륜 관계를 가장 자연스러운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아 효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로 여겼다(벨라, 1981). 하지만 유교 문화권에 들어선 동북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서 그 가치가 일차의 우위성을 유지하면서 그 힘을 떨치게 된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국가/왕에 대한 충이라는 헌신과 복종보다는 가족/()에 대한 효라는 헌신과 순종이 더욱 강조되었다. 효의 가치는 절대의 자리로 올라서 그 원리는 모든 행위에 우선하였다. 조선 사회의 윤리와 교육은 물론 모든 제도 또한 이의 일차성을 지켜주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효 중심의 유교를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는 조상 숭배라는 의례도 제도화되었다. 조상에 대한 숭배의 신앙과 이에서 비롯된 의례는 조선의 유교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계 사회의 남성 우선 원칙에 따라 제사가 조직되었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효의 원리도 강조되어 왔다. 조상 숭배의 의례와 효는 겉과 속일 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뭉치였다(崔 吉城, 1986: 3). 비록 유교식의 제사 제도가 고려 말이 되어서야 중국에서 들어오고 그것이 조선 사회에 제도로서 일반화된 것이 17세기 이후라고 하더라도(윗글: 91) 조상을 우러러 받드는 종교의 심성과 의식은 이처럼 아득한 지난날의 부계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교에 앞서 우리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불교조차도 혈연의 관계를 귀히 여기는 조상 숭배와 효의 의식 세계를 거부하지 않았다(박 영신, 윗글).

 

조선 사회는 효의 가치와 그것이 제도화되어 나온 조상 숭배의 의식 세계로 표상된 유교에 의해 빈틈없이 짜여졌다. 삶의 영역 모두가 이 종교 신념에 이어져야 있었기 때문에 어느 영역도 자체의 자율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영역에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보기를 들어, 교육 제도와 유교라는 종교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교육 제도 속에 유교가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교육 제도를 바꾸고자 해도 그것은 다만 교육 제도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유교라는 종교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했다. 그만큼 사회 영역과 종교 영역이 분화되지 않고 함께 녹아있었던 것이다. 종교를 바꾸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기에, 조선 사회에서는 어느 영역을 혁파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회의 어느 영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유교의 틀과는 다른, 유교의 권위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대안의 상징 능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능력을 제공해 준 것이 개신교 기독교였다. 개신교라는 외래 종교가 조선 땅에 들어왔을 때의 역사 상황은 지난 날 천주교의 경우와는 달랐다. 개신교라는 서양 종교에 대해서는 훨씬 부드러운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개혁 지향의 세력이 개신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고, 선교사들도 조심성 있게 선교 운동을 펴 개신교는 조선 사회에 좋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새로운 학교를 세워 겨레를 위해 일할 새로운 인물을 기르고(박 영신, 2012) 병원을 열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 이와 함께 개신교에 들어서는 교인도 늘어나고 교회도 많아졌다. 개신교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것은 전래의 문화와 만나 소통해야 했다는 점에서 어쩔 수없는 종교혼합 현상속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기독교는 한국인의 말글뿐만 아니라 민속 신앙에 담긴 관념을 받아쓰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해야 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퍼지게 된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도 할 수 있다(정 대위, 1986: 142-171; 유 동식, 1996; 김 은기, 1996). 그럼에도 기독교는 기독교여야 했다. 기독교는 더욱 깊은 수준에서 전래하는 의식 세계를 질문하고 새로운 삶의 의식 세계를 열어보였다. 기독교인은 그러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이들 초대 기독교인은 더 이상 유교를 구원의 길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기독교가 내세우는 초월의 존재를 절대의 권위로 믿어 다른 어떤 것에 대하여 절대의 권위를 주지도 않았고 또 줄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들 기독교인이 유교 지향성에 맞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 변혁 세력이 되었다.

 

이제 이들은 조상 숭배의 제사 제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개신교 기독교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한 세기나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가 제사 제도와 대립한 바 있고 이 때문에 수난을 당한 바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천주교의 선교 전략을 예의 검토한 다음 신중에 신중을 더하고자 하였지만(박 영신, 1985/1996) 조상 숭배의 신앙 문제에서만큼은 피해갈 수 없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밑뿌리가 되는 믿음이기에 그러하였다. 박해를 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 믿음의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독교에 들어와 세례를 받게 될 때는 모두가 “[....] 조상의 영들을 존경하는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복종한다고 고백하고 선언하도록 했다. 이렇듯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효에 터한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를 강화해온 조상에 대한 숭배의 의례에 맞설 수 있는 변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박 영신, 2008/2011: 112-113).

 

그러나 조선의 유교 전통에 대한 비판은 줄기차게 펼쳐지지 못하였다. 일제 강탈의 지배 밑에 들게 되면서 전래하는 조선의 의식 세계에 대한 비판의 에너지는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반일 자주 독립의 영역으로 옮겨가 거기에 투입되어야 했다(박 영신, 1983/1987: 254-256; Y. Park, 2000: 515-518). 조상 숭배에 대한 거부는 그 수준에서의 거부 행위였을 뿐 그것이 삶의 모든 수준으로 침투해 들어가 의식의 밑뿌리를 바꿔놓을 만큼 끈질기게 변혁의 에너지를 자아내지 못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개신교마저도 혈연에 터한 가족의 가치를 일차의 것으로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이해하는 좁다란 의식 세계를 깨뜨릴 수 없었고, 혈연의 관계를 넘어서서 모두를 한 형제자매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더욱 넓은 공공의 의식 세계를 만드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오랜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는 없어지기는커녕 근본의 수준에서는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의 삶 속에 굳건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3. 교회의 발자취

 

우리가 바랐던 그대로 일제 강탈의 계곡을 지나 광복을 맞았다. 비록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지만 그것은 우리가 되찾고자 한 바로 그 나라였다.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기보다는 긍정하고 후원해야 할 나라였다. 강탈기의 자주 세력이 바랐던 광복을 이룬 마당에 우리 사회의 깊은 문제를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자기 집안 중심의 좁은 의식 세계를 일관되고 집요하게 비판할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우리 사회는 갖지 못하였다. 우리가 좁다란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에 갇혀 더욱 넓은 공공의 의식 세계를 저버리고 있다는 소리는 허공에 떠돌고만 있었다.못 살겠다며 정권을 바꾸자 하고 마침내 독재라고 해서 타도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밑뿌리 문제가 되는 좁다란 가족 중심의 사사로운 의식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세력도 정면으로 맞서 공공의 수준에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았고 발언의 터전도 가꾸지 않았다. 모두가 이 깊은 문제를 깊은 문제로 여기지 않고 지나쳤던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이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 곧 가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진행되었다. 군사 쿠데타 이후 우리가 경험한 경제 성장도 이러한 의식 세계를 효과 있게 동원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국의 근대화라는 경제 성장의 열매는 가족 중심의 의식에 경제 가치의 중요성을 접붙여 놓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박 영신, 1983/1987: 256; 1986/1987: 8; 1987/1995: 1). 우리 집안이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집안 식구가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견뎌낼 수 있었고 그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어야 했다.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도 오로지 잘 살아보자는 그 한 가지 열망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일터에서 열심을 다해 일하였다. 가족주의는 우리에게 엄청난 동기의 원천이고 윤리의 지침이기도 하였다. 집안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길이라면 정부가 주도한 산아제한의 각종 정책도 모두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무분별한 임신 중절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윤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Y. Park, 1994: 117-118). 정부가 나서서 잘 살아 보자며 경제 욕구를 부채질하고 그것을 모든 사회 구성원이 받아들여 거기에 삶의 목표를 두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은 날개 돋친 듯 속도를 내어갔다. 경제로 세상을 보는 경제주의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갔던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은 한 동안 서양의 사회()학이 주장해온 것과는 달리 전통의 청산은 고사하고 근본에서는 가족주의라는 전통과 모순을 일으키거나 갈등을 빚지 않고 그 틀 안에서 평탄하게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경제 성장의 본보기처럼 되기도 하였다. 우리도 산업화된 다른 사회의 구성원처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욕구로 움직이고 시장 지향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경제 인간이다. 그러하나 우리는 개인을 단위로 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단위로 하여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켜왔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경제를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면 정확히 그것은 일반스런 뜻에서가 아니라 가족주의라는 우리의 의식 세계에 터한 친분 자본주의라고 해야 옳다(박 영신, 1989/1995: 특히, 22-23).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삶의 원리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 전래의 가족주의로서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결속 의식을 강조하는 삶의 모형으로 삼아 행동을 이끌어 가고 조직을 운용하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과 어울려 경제 논리로 삶을 이해하고 경제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가늠코자 하는 경제주의 원리이다. 가족주의와 경제주의라는 이 두 가지 원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삶과 조직을 다스리고 이끌어가는 행동 지향성을 마련해주고, 우리 사회에 동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박 영신, 1998: 184-215).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어떠한가?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짜임새 안에서 어떤 꼴로 나타나게 되었고, 우리 사회를 휘몰아온 조국 근대화의 동원 체제에서는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어디에 자리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 짧게 밝혀두었듯이 우리 역사에 들어와 변화의 공급원이 되었던 초대 기독교는 그것이 터한 초월 신앙에 따라 그 시대의 삶을 지배해온 유교의 절대성조차 비판하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대안의 삶을 향한 변화의 신앙 운동이었다. 그러던 기독교가 일제 강탈기를 지나 나라를 되찾아 우리의 정부를 세우게 되면서 변화의 능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전래하는 의식 세계에 대한 비판이 외/왜인의 지배에 대한 자주의 욕구로 옮겨갔던 바로 그 집합의 바람이 우리 정부의 수립으로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정부를 두둔하는 친정부 조직 세력이었지 그것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믿음의 지향성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군사 쿠데타 세력과 그것이 획책한 장기 집권과 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살아보자며 열창한 거대한 국민의 합창 행렬에 모두가 홀려 있는 동안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 가치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 일사분란하게 정책을 추진해야만 능률이 난다고 믿는 군사정권에 어떤 어깃장이라도 놓게 되면 그것은 정책에 대한 한낱 비판이 아니라 반국가세력이고 심지어는 좌경세력으로 규정되었다. 특정 정부가 국가와 등식화되었던 그 시대에서 교회는 권력의 독선에 대하여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변화를 요구하고 나오지 않았다.

 

교회는 조국 근대화라는 깃발 밑에 들어서서 경제 성장을 향한 국민 총동원의 대열을 이끌고 그것을 독려하기만 했다. 교회는 정부의 정책에 장단을 맞추고 정부의 주의주장과 한통속이 되었다. 정부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고 정부 덕분에 몸집이 커갔다. 이에서 재미(?)를 본 교회는 정부가 외친 구호를 고스란히 받아 그대로 외었다. 구호의 복창은 의식의 일치를 말한다. 교회는 정부의 선창으로 온 국민이 합창하게 된 물질의 풍요를 함께 노래하였다. 정부가 눈에 보이는 생산 증대를 1경제라 하고 이것을 뒷받침해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문화로서의 2경제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 교회는 모든 것을 경제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정부 주도의 경제주의 문화를 전혀 비판하고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고 강화시켜주는 제 2경제의 역군 역을 수행하였다(박 영신, 1995: 137-138). 교회 어디에서도 맘몬을 섬긴다거나 섬기자고 내놓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회는 경제주의를 지지하고 그 속에서 성공과 축복을 풀이해주고 그것으로 교회의 부흥과 목회의 성공까지도 가늠해 왔다(박 형삼, 1997). 다른 어떤 가치보다 경제의 양화 논리를 길잡이로 삼아 교인의 머리수와 거기서 나오는 재정 수입과 재산의 규모로 목회의 능력을 판가름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우리 교회를 식민화시킨 유물론이었다. 유물론이란 어느 체제의 불럭에서나 어느 이데올로기의 논리에서만 득실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의 가치를 모든 것 위에 두게 된 우리 사회의 물줄기에 교회도 들어서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추종하고 숭상하였다. 이 물질 지향의 의식 세계를 가리켜 앞서 내가 이름붙인 바 그 유물에 교회가 함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박 영신, 1995/2006: 특히 150-151). 이것은 맑스류의 좌파유물론의 옆자리고 들어선한국 교회 안의 “‘우파유물론이었다(박 영신, 2006: 344).

 

경제 성장이 가족 단위로 이뤄졌듯이 교회의 부흥과 성장도 개체 가족과 유사한 개교회단위로 이뤄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교회주의라는 것도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한 가족 단위처럼 움직이며 다른 교회들과 경쟁을 벌인다. 기업체가 개체 기업으로 시장에서 경쟁하듯이 교회도 개교회로 경쟁한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도 되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조사에서 교파가 너무 많다’, ‘단합이 안 된다’, 또는 지나치게 자기 교회 중심이다하고, 나아가 목회자의 사리사욕/이기심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한미준/한국갤럽, 2005: 262-264) 우리 사회의 밑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좁다란 가족주의/유사가족주의가 밖으로 드러난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우리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가 그것과 맞붙어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고 수용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됨됨이와 뒤범벅이 되어 교회가 세속 사회와 근본에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집단으로 굴러간다. 교회에 분주하게 들랑거리는 교인들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꼭 같이 좁다란 가족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바꿔 말해, 교회에 다니든 안 다니든 모두가 물질의 부를 갈망하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꿈을 꾸며 그것이 보장되는 자리로 올라가고자 발버둥 친다. 그리고 같은 경제의 잣대에 따라 삶의 성패를 잰다. 마침내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더 이상 별난 사람이 아니라 평균치의 인간, 보통 사람이 되어버렸다(박 영신, 1984/1987: 367-371).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어떤 근본의 차이점을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박 정신, 2008: 152-156). 물질 지향의 삶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데서만큼은 진보든 보수든 어떤 차이도 보여주지 않는다. 교회는 우리 사회의 주류가 치켜세워온 경제주의와 하나가 되어버렸다. 주류 그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고자 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그 주류를 믿음으로 떠받쳐주는 체제의 하수인 노릇을 교회가 기꺼이 맡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의 우리 교회는 초기에 보여주었던 변혁 지향성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우리 사회가 휘둘러온 휘두름에 일방으로 휘말려든 무기력한 거대 집단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가 종교가 사회를 바꾼다는 사회 이론의 보기가 될 수 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회가 종교를 바꾼다는 사회 이론의 보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교회 세습의 모습

 

교회가 경제 성장의 물줄기에 합류하면서 교회도 급성장했다. 특별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교회는 눈부신 성장기를 맞았다. 1960년에는 교인의 수가 고작 백만 명 정도였으나 1970년에는 배로 늘어 2백만 명을 넘어섰고, 1985년에는 놀랍게도 인구의 약 20퍼센트가 되는 천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때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진입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서는 인구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과 함께 인구 전제의 9할이 도시 거주민이 되었다(Hong, 1997: 9-13). 안정된 농촌을 떠나 낯설고 불안정한 도시의 삶 속으로 던져지게 된 이주자들이 교회로 속속 찾아들었다. 교회는 그들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어떤 공동체였다. 도시 주민에게 이들 교회는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주일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마치 남북으로 나라가 갈라진 다음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고향을 맛보고 고향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이북교회라는 곳에 몰렸듯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온 사람들도 고향을 찾고 고향 사람을 만나고자 교회로 찾아들었다. 이들은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가깝고도 끈끈한 느낌을 교회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이북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평안도교회가 있었듯이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전라도교회도 생기게 되고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출석하는 경상도교회도 나타나게 된 것은 그러므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늘어나는 도시 유입 인구를 끌어들였다.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커져 갔다. 교회는 성장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하여 달음박질하였다. 도시 거주자에게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정부가 편 개발 정책과 그것이 만들어낸 건설 붐은 교회 성장에 기회가 되고 계기가 되었다. 개발 지역은 교회의 개척지가 되었고, 구도심 지역에 있던 교회를 팔고 옮겨와 새로 지을 교회당의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주택 정책에 따른 공간 밀집화과정에서 대형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徐 佑錫, 1993). 도시의 교인들은 늘어만 갔다. 교회 건물은 더욱 커야 했다. 교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시설도 갖추어야 했다. 교회 터에는 교육관 건물이 들어서고, 경관이 좋은 곳을 찾아내서 그곳에 수양관도 짓고 기도원 건물도 짓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밟아 메가처치라고 불리는 덩치 큰 대형교회가 나타났다.

 

대형교회가 확장해 가는 품은 기업체와 비슷했다. 구도시에 머물러 있는 목사들과 달리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놀라운 사업가 기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민첩한 개발업자나 부동산업 종사자와 마찬 가지로 그들은 어디에 새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 목사는 살벌한 도시의 삶에 분주하게 적응해가야 하는 교중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도 해야 했고, 점차 비대해지는 교회의 행정 사무도 주관하고 감독할 수 있어야 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교회의 모든 일을 목사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교회에는 여러 위원회가 있고 당회도 있고 교인도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라는 조직의 상좌에 앉아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은 목사이다. 누구보다 먼저 대형교회를 일구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교인을 모아 그것을 따르도록 훈련시키면서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목사이다. 모든 면에서 그는 기업의 창업주에 버금하는 대단한사람으로 인정받은 자다. 보잘 것 없는 작은 교회를 짧은 기간에 어마어마한 대형교회로 부흥-성장시킨 놀라운일을 해낸 사람이라면 대단한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가업을 일으켜 세운 집안의 어른처럼 도도하게 행세하고 교회 조직을 친족 조직처럼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는 교중에게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주어 교중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공경하고 섬긴다. 베버(Weber, 1968: 260-261; 박 영신, 1976/1978: 8-9)가 말하는 뜻에서 그를 카리스마의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교중이 높이 우러러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는 신학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는 말재주를 가진 웅변술에 능하여 감점에 호소하는인기 있는 대중 설교가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라는 그 직위 때문에 나라 안뿐만 아니라 나라 밖에서도 저명한 인사가 되어 명성과 명예와 위엄을 얻는다.

 

그는 교세를 확장하면서 교회의 재산은 증식된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처럼 교회도 교육 기관을 비롯한 각종 사업을 펼쳐 확장한다. 교회 조직은 점점 커지고 복잡해져 조직, 업무 기획과 경영, 그리고 리더십에서 대기업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목사는 대기업체를 일군 창업자나 기업총수처럼 교회의 창업자이자 총수로 행세하는 교회 기업가가 된다. 교회는 십자가를 달고 있다는 것을 빼면 기업체의 조직과 별반 다르지 않고, 목사는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재벌 총수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 막강한 대형교회 목사도 목사직을 내놓아야 할 때를 맞는다. 그가 누린 권력과 권한을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시점에서 후임자의 문제를 꺼낸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형교회 특유의 목회를 이어받을 자격자란 흔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임자를 물색하여 그에게 교회를 순탄하게 물려주어야 하는 카리스마의 통상화’(the routinization of charisma) 과정은 매우 중대하고 절실하다(Weber, 윗글; 박 영신, 1976/1978: 25-27). 목사는 자기 입맛에 맞는, 다른 말로 교회 창업자’(?)인 자신의 비전을 흐리게 하지 않고 충실히 이어갈 후임자를 찾아야 할 짐을 지게 된다. 이 일이 중대한 만큼 험난하고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은퇴 자체를 미루기도 한다.

 

후임자 문제는 목사만의 중대 관심사일 수 없다. 교회의 급성장 역사에서 주요한 직분을 가지고 그와 함께 일하면서 담임목사의 비범한 지도력을 직접 보아온 이들에게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애초의 비전이 탈색되거나 퇴색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마음에서 이들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후임자 문제로 고심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형교회를 일군 그 기적의 주인공이 목사이기에 후임자 선임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 그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되면 목사는 자기 혈육을 나눈 아들을 후임자로 내세워도 안전하다고 보고 세습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실행해 간다.

 

이 일에는 여러 조건이 붙는다.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이어받을 아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들이 자동으로 곧장 담임목사직을 이어받는 것은 아니다. 후임자가 되는 데 손색이 없을 만큼 그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신학교를 졸업해야 함은 물로 유학도 다녀와야 하고 여러 훈련 과정을 밟아 목회 소양과 지도력을 키워야 한다. 자기 아버지 밑에서 훈련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아들이 부목사나 전도사로 교회의 주요 부서를 맡아 일하면서 교중과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이와 같은 준비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목사는 공식으로 자신의 후계 구도를 알리고 자기 아들이 후계자라고 공식으로 지명한다.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헤아려 줄 것을 요청한다. 그와 같이해온 교회의 주요 직분자들은 일찍부터 목사의 의중을 알고 있던 터라 그의 후계자 지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나머지 목사의 존재는 교회 조직과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터라, 교회의 안정을 지키고 성장을 이어가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한 다음 오랜 고심 끝에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간절하게 이야기한다. 교중은 그의 뜻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은 적법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거기에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단지 딴청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 일로 교인들이 갈라져 나가는 것쯤은 크게 관심 둘 바도 아니다.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이 일을 두고 옳으니 그러니 하는 것은 남의 집안 일에 참견하려는 무례하고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자기 교회의 결정을 변호한다. 어느 거대 교회에서 벌어진 세습을 지켜본 젊은이가 내게 들려준 것처럼, 세습을 반대한다며 교회 문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것 정도는 간단히 무시된다. 그것은 기껏 일부의 의견일 뿐 전체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라고 자처하는 데서는 이러한 문제는 문제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카리스마의 통상화 과정은 이렇게 결말을 본다.

 

목사가 뜻하는 바대로 부드럽게 세습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당회(또는 장로회/위원회)이다. 교단의 조직과 전통, 그리고 교회의 위계질서와 같은 여러 측면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 당회의 권한과 책임 행사가 세습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김 성권, 2002: 74-86). 달리 말해서, 당회의 자율성 정도가 높을수록 목사 중심으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고, 당회의 자율성의 정도가 낮을수록 목사 중심으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당회 조직의 자율성은 교회 세습의 성사와 함께 그 과정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위에서 보듯이 교회의 세습은 담임목사가 교회를 애초 설립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공로와 지위가 확고한 데서 벌어진다.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켰거나, 개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거지로서의 가치를 잃고 있는 지역에 있던 작은 교회를 값나가는 새로운 주거지로 옮겨 대형교회로 키워, ‘교회 기업의 창업자로 행세할 수 있는 카리스마의 인물이 세습을 획책한다. 그러한 까닭에 후계자가 되는 아들의 자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카리스마를 가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후광 때문에 그 카리스마의 세습 계승으로(Weber, 윗글: 57) 어렵지 않게 용인되고 인정될 수도 있다. 이 점을 동원하여 아버지가 자신의 목사직을 아들에게 넘겨야만 교회의 안정과 지속성을 지켜갈 수 있다고 하고, 교중이 이러한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교회 세습의 과정이다.

 

5. 되새김

 

교회 세습은 넓은 정당성의 근거를 획득하기에는 너무도 불공평하고 부당하다. 이 문제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논의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의는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의식 세계와 맞닥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 자체가 표피의 수준에 머물러 그 문제 자체를 도려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의는 어느 특정 표면의 문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벗어나 문제의 밑뿌리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땅에 묻혀 쉽게 볼 수는 없지만 뿌리 없는 나무줄기는 없는 법이다.

 

교회 세습의 밑동은 (유사)가족주의 의식이다. 재벌가의 세습과 권력가의 세습 행태, 아니 우리 모두가 저지르고 있는 각각의 세습 행태 그 밑뿌리는 모두 같다(Y. Park, 2012). 이 모두는 같은 의식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자기 혈육에게 특혜를 주는 행태가 나타난다. 이러한 지향성은 고무줄과도 같아서 상황에 따라 늘어날 수 있다. 이것이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지연으로, 학연으로 뻗어나가고, 집합 위기나 집합 흥분 상태에서는 국민 전체로까지 내뻗어나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지향성은 어쩔 수 없이 친분 중심의 비좁은 틀 안으로 회귀코자 한다. 다른 지역 사람보다 자기 지역 사람에게, 다른 학교 출신보다 자기 학교 출신에게, 다른 교단/교회보다 자기 교단/교회 인사에게 더 이끌린다. 더 가깝게 느끼는 이에게 특혜를 준다. 친밀함의 범위와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사로운 집단의 이기주의 의식에 뿌리내려 있다. 그러므로 이에서 비롯되는 행태는 꼭 같이 불공평하고 부당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오늘날의 경제주의 지향성이 들어붙어 특혜는 경제/물질/재산의 혜택으로 나타난다. 교회 세습은 이러한 의식의 세계에 터하고 있다.

 

교회 세습은 분명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이 시대의 문제이다.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 뿌리내린 그 밑뿌리의 문제를 들춰내어야 한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둔 채 땅 위로 뻗은 나무줄기 하나를 자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온당치 않고 또 어리석다. 이러한 뜻에서 교회 세습의 문제는 그저 교회 세습의 문제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문제의 표면이지 밑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 논의는 문제의 부분일 뿐 문제의 일반일 수도 없다. 같은 뿌리에 이어진 다른 나무줄기들이 이미 뻗어 있다. 논의가 교회 세습 문제에만 파묻혀 꼭 같이 불공평하고 부당한 의식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모순과 위선의 늪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맞닿아 있는 밑뿌리에서 나온 다른 항목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이어져 있을 밑뿌리와 나뭇가지를 동시에 가차 없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가 다 같이 시달리고 있는 비좁은 의식 세계를 돌파하여 더욱 넓은 관심의 의식 세계로 나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자기 부정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참된 뜻에서 시민다움을 일깨우고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시민다움이란 흔히 말하는 시민의 권리 주장이 아니라 이웃 일반에 대한 책임과 이어지는 삶의 지향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시민다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됨으로 돌아가, 현존하는 특권과 특혜의 구분과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이웃으로 보살핌을 받는 그러한 뜻에서 공공영역에의 참여와 책임을 다하는 삶을 말하고(박 영신, 2003, 2011; 정 재영, 2012: 9, 11), 시대를 몰아가는 삶의 방식과 관행에 맞춰 살아가는 체제 추종과 순응이 아니라 이에 맞서는 체제 저항과 대안의 삶을 말한다(박 영신, 2010/2012).

 

그러므로 교회 세습의 문제는 더욱 깊은 논의를 요청한다. 이러한 논의는 그 어떤 것에도 무릎 꿇지 않고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믿는 자에게 맡겨져 있다. 오직 이 믿음의 사람만이 체제의 넓은 길을 거부하고 반체제의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길에 들어선 자신의 삶을 넘치는 하늘의 은총이라 여기고 이 길을 걷도록 부름 받은 자신의 삶을 과분한 하늘의 복으로 받아들인다.

 

 

출처 :학술 심포지엄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발제문
주최 :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일시 : 2013년 2월 19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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