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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반대한다
 
박득훈
서울교회 담임목사
기윤실 사회정의운동 운영위원장
 
 
일부대형교회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목사직을 이어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현재 교회 안에서는 찬반의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매우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안인데다가 양쪽 다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차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면서 자신의 입장이 정말 옳은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논쟁이 생길 때마다 생각나는 말씀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이다. 그 당시 할례문제는 교회를 둘로 가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고 열린 대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하였다. 초대교회에 그것이 가능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우선 찬성하는 논지들을 살펴보면서 왜 현재의 교회현실 속에서 부자계승을 허용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가를 밝힌 다음 반대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세습반대운동의 방법론의 정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다만 운동당사자들은 냉철한 성찰과 토론 그리고 기도의 과정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지혜롭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 운동에 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바라기는 방법론에 대한 불만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본론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지면문제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모든 논의의 이면에는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분들에 대한 존경과 한국교회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바라는 애정이 담겨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고자 한다.

 
1. 부자계승 찬성론에 대한 반론
 
찬성론을 이야기 할 때 세습이란 말 대신에 단순히 부자계승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찬성론자에 의하면 세습이란 단어가 담임목사직 부자계승을 일반적으로 표현하기에는 그 부정적인 함의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첫째로 제시되는 것은 단어의 정의와 관련해서 한국교회에서 세습이란 없다는 주장이다. 세습에는 통상 재산권이 관련되어 있는데 교회의 경우 이 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언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어의 뜻은 사용되는 정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 그래서 사전적 정의를 인용할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세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정한 특권이 혈연적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세습반대를 특별히 대형교회에 국한시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에는 시골의 가난하고 작은 교회의 경우와는 달리 세상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다양한 특권과 기득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오늘의 한국교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대형교회 목사의 위상과 영향력이 단적으로 그것을 말해 준다. 그들의 영향력은 단순히 영적인 권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적, 재정적 자원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영적인 권위라는 아름다운 말속에 감추어 두려고 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외적인 힘은 영적인 힘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수물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은 성경의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특권이 부수물이라고 해도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차종률 목사님은 교회는 세상정치나 기업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이익집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데는 중․소형 교회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아픔이 따르기 때문에 세습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형교회의 외적 특권을 사랑해서 부자계승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원론적인 면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객관과 주관 그리고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주관적으로 그러한 외적 특권들에 관심을 안 가진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그 특권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세습이라는 단어는 유효성을 가진다. 또한 이상적인 교회는 본질적인 면에서 세상의 정치나 기업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그러한 특권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교회도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란 점에서 현실적으로 상당 부분 세상의 집단들과 유사한 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에 관련된 특권들이 목회자에게도 끊임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성경적 인간론과 구원론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하고 겸손한 자세라고 본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고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을 고난의 길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진실의 한 쪽만 보려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형교회가 이권기관의 병폐를 띄게 되는 것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부자계승 즉 세습은 피해야 한다. 막연히 이상적 상황을 가정하면서 목회세습이라는 단어자체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부자계승을 승인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다. 혹 현재의 일부대형교회의 아버지와 아들 목사가 이런 유혹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운 이상적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는 자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세습불가론을 펼쳐가면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단지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현재 한국의 일부대형교회들은 이미 이권집단의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이라는 점이다.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교인으로 가지고 있어서 여러모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형교회는 결단만 하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물론 이는 대형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규모와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빛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대형교회들이 서로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권집단적인 요소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일단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교인들과 담임목회자의 이권에 대한 배려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수용되면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이를 다양한 신학적 혹은 성경적 용어를 빌어 정당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권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성경적 이유를 들어 교회가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한국의 일부대형교회는 이미 이러한 과정을 밟아왔다는 것이 우리의 이해이다. 그러기에 현재 일부대형교회에서 시도되고 있는 담임목사직 부자계승을 이야기 할 때 일정한 특권의 혈연적 계승이라는 의미의 세습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와 연결해서 제시되는 두 번째 주장은 담임목사직 부자계승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세습이란 표현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 목사가 직권을 남용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교단법과 교회법에 의거한 절차를 밟아 자발적으로 아들 목사를 후임목사로 초빙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우선 합법적인 절차의 내용이 문제이다. 즉 한국의 권위주의 및 혈연주의적인 문화와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거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감안할 때 아버지 담임목사가 현직에 있는 상태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는 것은 단순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가능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절대적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하는 심정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공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설사 아버지가 현직에 있는 상태에서 교인들의 뜻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해도 그들의 뜻이 개교회의 진정한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지대하다고 판단될 때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아래에서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선택은 아버지 목사가 현직에 있는 상태에서 후임자 결정의 공정성을 진실로 확보하려면 아들은 후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만일 아들을 담임목사로 세우기 원한다면 그 자격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는 아버지 목사가 은퇴하고 그의 실질적 영향력이 확실히 사라진 후에 시작되어야 진정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로 아들 목사가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부자계승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능력도 없는 목사를 단지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후임으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부와 빈곤의 대물림으로 말미암아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적 현실을 감안 할 때는 아버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훨씬 덕스럽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마치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예수님처럼 성도들과 다른 목회자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후 8:9). 아들이 아버지 교회에 남아서 훌륭하게 목회를 해내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한국교회 전체에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이요(레 25 장), 다른 이의 덕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사랑의 정신인 것이다(롬 15:1,2; 고전 10:23-24).
 
넷째로 아버지 목사와 아들 목사의 목회철학의 공통점과 친밀한 관계가 대형교회의 성격상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하나 됨 그리고 안정을 유지하는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의 생존전략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이지만 오히려 이 점이 대형교회의 약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교회의 성장과 연합 그리고 안정은 누가 목회자가 되든지 머리되신 예수님을 철저히 붙들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공통점과 친밀한 관계에 의존하려고 한다면 이는 벌써 그 동안 대형교회가 얼마나 예수님의 권위보다는 아버지 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존해왔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다섯째로 아들이 최후의 선택인 경우에 부자계승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 후임자로 은밀히 길러왔던 이들이 다른 길을 갖고 초빙하기를 원했던 목회자들이 사양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그 부럽고 매력적인 자리를 마다했을까? 이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대형교회일수록 전임자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후임자가 도저히 적응해나가기가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대형교회 후임 목회자 자리를 사양한 사람들은 현명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한번 대형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여섯째로 아들이라고 해서 후임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는 항변이다. 즉 부자계승을 반대하는 것은 세속적 논리를 교회 안으로 끌어드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의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침묵을 바로 긍정이나 허용으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상황에서의 부자계승이 성경전체의 정신과 사상에 과연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편 일반적 상식과 양심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롬 2:14-15; 13:5). 하나님은 비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양심 혹은 자연법을 통해서 병들어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부끄럽게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자계승의 성공사례를 든다. 우선 소위 성공사례로 여겨지는 교회의 담임목사직이 계승될 때 그 교회가 대형교회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소․중형교회의 부자계승도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권위의 집중현상과 기득권의 혈연적 이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 전체에 미치는 여파에 있어서 대형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부자계승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적합치 않다. 더구나 성공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교인의 수가 늘고 표면적으로 평화로우면 성공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상의 현상들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공을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만 의존해서 해석하는 데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의 구체적인 나눔의 삶이 나타나고 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훈련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행 2:42-47; 4:31-37). 이렇게 볼 때 소위 성공사례도 현재의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부자계승을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2. 세습 불가론
 
불가론을 전개할 때는 세습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세습을 저지해야 하는 보다 적극적인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세습은 교회론의 핵심 중에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 머리되심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엡 1:2-23; 5:23).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끊임없이 권력과 명예에 대한 유혹을 받고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위험은 대형교회일수록 클 수밖에 없다. 목회에 성공했다는 그 자체가 담임목사에게 넘볼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경계하지 않으면 담임목사가 실질적인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자간의 세습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위치를 불필요하게 지나치게 강화함으로서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 진다. 이러한 위험성을 알고서도 그 길로 굳이 가려는 것이나 이를 방치하는 것은 모두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설사 교인들이 원한다고 해도 교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이는 억제되어야만 한다.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빠져서 극소수를 제외한 교회 전체가 객관적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주님의 영광보다는 서로의 영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요 5:44). 막연히 이상적 상황을 가정하고 형식논리에 의거하여 세습을 지지하기에는 그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아들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경우에 이러한 위험부담을 안고 들어가는 것은 더욱 지혜롭지 못하다.
 
둘째로 세습은 교회의 언약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는 혈연적인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도들이 가정을 잘 세우도록 권면하고 지도해야 한다(눅 2:51; 요 19:26-27; 막 7:9-13; 엡 5:21-6:9). 가정에서 모범적인 남편이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다(딤전 3:2, 4-5). 그러나 교회는 혈연관계에 의해 좌지우지 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언약을 맺은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이지 혈연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막 3:31-35).
 
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지금도 매우 혈연중심적이다. 가족경영체제인 재벌은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래서 재벌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사전에 등록되기까지 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정권이 세습되는 것은 전세계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혈연관계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주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어떠한 폐단을 가져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혈연체제가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세습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성사되었고 부자(父子)가 모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문제가 전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관적 확신이 바탕에 깔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인간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결과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거듭난 성도와 목회자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으로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본주의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끼리는 명목상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해야한다. 대형교회에서의 세습은 한국의 혈연중심적 문화를 감안할 때 실질적 민주주의가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는 일에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습은 저지되어야 한다.
 
셋째로 세습은 한국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나라의 원칙보다는 자본주의적 원칙에 은연중에 익숙해져왔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축적한 부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합법화 되어있고 자연스럽다. 사실 그것이 부의 축적의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원칙은 그렇지 않다. 안식년과 희년 법칙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실상 재산권 상속을 제한시키는 법이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자 관원에게 재산을 팔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에 따라오라고 했다(마 19:21). 예수님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초대교회는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나누었다. 그들은 상속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을 사유재산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 자본주의사회의 원칙과는 얼마나 다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희년을 목회세습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땅과 담임목사직에는 성격상의 차이가 있고 교회의 경우는 담임목사직을 돌려줄 원래의 주인이 없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담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는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세습을 추진하는 분들은 위에서도 본 것처럼 이러한 특권의 이양이라는 요소가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항변이 진실하다고 해도 세습은 포기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자식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대다수 목회자들의 본능적인 마음에 불을 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도자는 자신의 결정에 아무리 꺼림이 없다고 해도 그 결정이 공동체 전체에 어떤 여파를 끼칠 것인가를 예리하게 판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한국교회의 지도자이다.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지키고 세상의 빛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한다면 세습은 당연히 포기되어야 한다.
 
넷째로 세습은 이미 왜곡된 교회의 지도체제에 도장을 찍어주는 행위로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을 반영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체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진리를 받혀주는 기둥이요 터전이기 때문이다(딤전 3:15).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진리도 함께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교회가 바로 서려면 교회의 지도체제가 건전해야 하고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를 아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딤전 3:1-13). 더 나아가 지도자를 바로 세우는 것은 교회의 구원과도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딤전 4:16). 중세교회의 타락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교황의 권위가 절대화 될 때 교회는 부패했고 진리는 무너졌다. 심지어는 구원의 진리까지 위태롭게 흔들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형 대형교회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담임목사의 카리스마가 너무 막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확신가운데 빗나가면 진리가 흔들리고 해결의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해당교회를 떠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세습의 문제점은 바로 이렇게 일그러진 지도체제를 굳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실질적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되었는데 누가 감히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아들을 중심으로 한 팀목회라는 것도 사실은 실세를 포장하는 눈가림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은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이다. 그래서 현명한 지도자는 자신이 잘못 했을 경우 실제로 견제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실질적 분위기와 여건을 조성해 놓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병폐의 한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대형교회가 한국교회의 성장에 미친 긍정적인 기여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그 동안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규모는 세계적인데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왔다. 그 원인을 분석해 들어가면 한국형 대형교회주의와 맞물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해서 단기에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축복과 고난을 함께 이야기하고 전도 및 선교와 사회참여를 같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온전한 복음은 매우 도전적이고 특히 기득권 층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속한 숫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이로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건강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조금씩 타협할 수밖에는 없게 된다. 소위 부담 없는 반쪽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나머지 반쪽은 적당히 양념 치듯이 넘어가곤 한다. 결국에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함으로서 자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대형교회 담임목회자가 진리를 왜곡시킬 때 개혁은 요원해 진다. 담임목회자의 적당한 타협으로 말미암아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게된 세력과 무지한 대중은 어느새 담임목사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고 개혁세력은 쉽게 거세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세습을 방치할 수 있겠는가? 이는 대형교회 자체를 반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만일 한국의 대형교회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형교회와 같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슬픈 것은 그 교회들이 오늘 한국의 대형교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형교회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된 결과일 뿐이었다. 한국적 분위기에서 숫적 성장을 교회의 신년목표로 삼는 것과 순수하게 결과로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한 사람에게 권위가 지나치게 집중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행 2:42; 6:2; 15:6-29). 초대교회는 교회의 대형화를 은근히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행 2:41-47). 그러므로 오늘 한국형 대형교회의 출현과 세습을 통해 대형교회 담임목사에게 지나치게 권위를 집중시키려는 현상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변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한다. 물론 세습을 저지하는 것만으로 일부 한국형 대형교회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소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세습을 일단 막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는다.
 
 
3. 맺음말
 
부자계승을 정당화하는 논증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현재의 부자계승은 세습이 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서 이를 저지해야하는 당위성을 살펴보았다. 일부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 동안의 한국교회의 병폐가 집약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다. 지금은 뒷짐을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울어야 한다. 그리고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습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교회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전적인 은혜의 결과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자신의 삶을 걸고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의 문에 붙이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이 가능했겠는지를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는 그의 능력을 의지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와 대응방안 - 공동포럼
주최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복음과 상황
일시 : 2000년 9월 5일(화) 오후 7시
장소 : 여전도회관 2층 루이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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