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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세습이 바람직한가?
  
이정석
국제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기윤실 신학위원장
 
 
한국사회는 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그로 인한 도시화로 인해 교회구도에도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제 성장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은퇴의 연령에 도달하면서 대형교회에는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후계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든 교인들이 그 지도자가 은퇴하고 떠나도 교회에 모두 남을 것인가? 이미 대형화된 재정과 조직 및 사업규모를 줄인다는 것은 심한 자괴감을 줄 수밖에 없고, 교인의 감소는 부풀대로 부푼 자부심에 견딜 수 없는 손상과 실망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은퇴를 앞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더 확장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현재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후임자를 물색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최고의 목회자를 자처하는 대형교회의 지도자에 비견할만한, 그래서 계속적 성장을 보장해줄 만한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젊은 목회자 그 누구도 탐탁치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형교회의 후임자는 그 누구라도 그 카리마스적인 목회자에게 길들여지고 자부심으로 가득 찬 교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영락교회가 그랬고, 충현교회가 그랬다. 차세대 중에서 촉망받던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 못한채 줄줄이 물러나야 했다.
 
요즘 문제가 되고있는 광림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다른 대형교회들에서 후계의 실패를 지켜본 이 교회로서는 더욱이 미래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10여년 전부터 후계자를 물색하고 키워보려고도 하였으나 만족한 후임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은퇴를 내년으로 앞두게 되어 아들을 선택하였다고 말한다. 이 말은 처음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키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계자 양성 혹은 초청계획에 실패하고 나서, 아들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후에 보니 아들이 가장 적임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광림교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아직은 목회를 계속할 수 있지만 은퇴규정 때문에 법적으로 은퇴하고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의 선택이 가장 용이하고도 호혜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팀목회라는 방식으로 전적인 지도력의 급격한 이양보다 부자의 협력 하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 아들이 세습논쟁의 비화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고 있지만, 그가 상당한 능력을 갖춘 목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그가 신학을 하게 된 것을 보면 부친을 존경하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아들을 대강단에 세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결코 이 일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의 수치와 실패를 원하겠는가! 더욱이 일생을 바쳐 이룩한 대교회를 항상 자부심으로 이끌어온 김선도목사가 왜 광림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할 후임자를 지지하겠는가? 따라서 그의 판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며, 그래서 광림교회와 연회가 그런 결정을 내렸지만, 그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비록 광림교회가 거교회적으로 오래동안 기도하며 훌륭한 지도자들이 다각적으로 논의하여 내린 결론이지만, 실로 이 문제는 여러모로 논란의 소지가 많다. 물론, 광림교회의 결정은 개교회의 문제로서 원칙적으로 외부인이 강요할 수 없다. 단지, 광림교회도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교회요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에 우려하고 기도하고 권면할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런 패턴이 많은 중대형교회에서 고려되고 있으며 확산될 수 있는 한국교회의 공동관심사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심각히 생각해 보고, 그것이 과연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며 한국교회 발전에 유익한 일인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목회세습이 바람직한가? 광림교회는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대개 후임자들은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주장하며 목회방침을 대폭 수정하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으며 아버지가 허물없이 가장 잘 지도할 수 있어서, 교회가 무리한 변화로 시달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를 보면 아들을 알 수 있듯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신앙적, 사상적 영향과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량과 성품을 가장 닮은 목회자가 되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따라서, 광림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기 원하는 수많은 감리교 목사들 중에서 아들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도덕적 원리로 마치 재벌세습과 같이 이해하고 매도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섭섭함과 분노를 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습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거부감을 느낀다. 왜 아들이라고 후임자 대상에서 배제해야 하며, 적법한 절차를 따라 결정한 후계를 왜 세습이라고 부르는가? 그러나, 그것이 목회세습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절대왕권에서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도 세자책봉을 비롯하여 복잡한 절차를 모두 거치는 것이며, 재벌이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때에도 주주총회를 비롯하여 복잡한 절차를 거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들을 아무 절차 없이 후임으로 임명하지 않고 교회 당회와 인사위원회의 절차를 거쳤다고 하여 세습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세습이란 절차 유무를 막론하고 아버지의 직책이 아들에게 후계되는 현상을 가리키며, 특히 아버지가 그러한 후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목회세습이라는 말 자체를 시비하기보다는, 부자목사로 이어지는 후계구도가 과연 바람직한가를 논하기로 한다. 만일 그것이 정말 바람직하다면, 유사한 상황에 처한 교회들에게 권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들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목사는 제한되어 있으며, 더욱이 소교회 목회자들은 자기 아들이 신학을 한다 하여도 자기보다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목회세습이란 아들이 목사인 중대형교회 목사로 한정되어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많은 수일 수 없으나, 목회후계문제로 위기의식을 느끼는 교회의 경우 새로운 해결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광림교회와 김선도목사가 유사한 상황의 교회들에 대하여 목회세습이 가장 성경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이라고 추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권하고 싶지 않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성찰해 볼 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안이 아니다. 왜 그런가? 첫째로, 목회세습은 교회성장의 공로를 인간에게 돌리는 세속적 교회관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다. 그리고, 불신자를 부르고 거듭나게 하여 교회를 형성하고 성장하게 하는 분은 성령이다.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는 모두 성령의 도구이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올바른 교회관에서는 인간의 공로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급성장한 교회들에서 교회 성장의 공로가 누구에게 돌려지는가?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철저히 담임목사의 공로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세속적 교회관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들이 교회를 인간들의 단체로 이해하고, 자본주의적 기업운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운영방식, 빈틈없는 회원관리와 철저한 조직망, 인기위주의 집회와 프로그램운영, 그리고 물질주의적 재정운영과 사업방식으로 무한확장을 꿈꾸는 이기주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하나뿐인 우주적 교회의식을 상실하고 개교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종이 되어 형제교회를 경쟁과 반목의 대상으로 보고 무한경쟁을 벌이면서, 교회의 성장이 철저히 자기들의 노력과 공로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적 성장에 성공한 중대형교회들에서 흔히 자만심과 자부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차있는 영적 질병을 발견한다. 고린도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실로 교회의 성장은 수적 성장이든 질적 성장이든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여하한 공로도 주장될 수 없다. 우리에게 전도의 열정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예수를 믿고 거듭나게 하여 교회에 접붙혀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목사의 설교에 감화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에 일치와 평화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교회의 성장은 결코 담임목사의 독자적 지도력이나 교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며, 현대적인 경영방식이나 인간관리 테크닉에 의한 것도 아니다.
 
물론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기업적 경영방식에 의한 교회성장도 있으나, 그것은 세속적 교회관에 의한 비정상적 성장이며, 따라서 지속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지역에 기반을 둔 교회는 지역적 요인에 좌우되고,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교회는 사상적 풍조에 의존하는 것처럼, 한 인간에게 기반을 둔 교회는 그 지도자에 의존하는 그릇된 성장형태인 것이다. 올바른 목회자는 자기영광을 거부하고 항상 교회의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교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그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중문화의 스타숭배에 오염되어 유명한 목회자에게도 지나친 의존과 일체감을 느낀다. 따라서, 인기있는 목사들이 진정한 내면적 겸손과 자기부인을 이루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여기서 실패하면,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허영에 희생되는 심각한 세속화를 초래하게 된다. 기독교신앙이란 특정 스타일이 아니라 목회자의 다양성을 초월하는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일관성과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실로, 목회자 집중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은퇴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며 급격한 혼란과 약화를 결과한다. 소수를 제외한 목회자들은 자기가 이임한 후 교회가 잘 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 겉으로는 잘되었다고 칭찬하고 감사하지만, 돌아서서 느끼는 속마음은 그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목사들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자기영광을 추구했는지 알게된다. 인간은 감정적 존재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교회가 너무 거룩한 주님의 몸이다.
 
목회자는 교회와 자기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아 일정 기간 위임된 교회를 섬기는 주의 종으로서, 임기를 마치면 미련 없이 이임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 이후는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적당한 후임자를 보내주실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보호하고 유지하실 것이다. 그런데도, 인위적 사고로 후계를 염려하고 노심초사하며 간섭하는 태도는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과 운영자인 성령을 무시하는 불신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가 적든 크든 주님에게 맡겨야 한다. 물론 목회자가 오래동안 심혈을 기울여 교회를 섬겨왔고 교인들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이임한다고 하여 하루 아침에 감정이 정리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런 이별의 아픔을 속으로 삭여야 하는 자기절제의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후임자를 위해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단절하는 결단도 요구된다. 물론 적절한 후임자를 위해 기도할 책임은 있으며 교인들이 추천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각별한 주의와 절제가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전임자라 할지라도 후임자를 결정할 권리가 없으며, 그의 결정이 장기적으로 최선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교인 전체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서, 성령께서 성도들을 통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교회는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직분자의 선임을 일임하지 않고 교인 전체의 투표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확인하였다. 비록 감리교회라 할지라도 개신교회의 일파로서,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카톨릭교회의 감독중심적 교회관을 따르지 않는다. 전임자의 공로에 근거하여 후임자를 결정할 수 있는 사실상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목회세습은 전임자의 공로를 근거로 거의 절대적인 결정권이 주어질 때만 가능하다.
 
둘째로, 목회세습은 혈연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아들이 가장 적임자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사실상 확률적으로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는 사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혈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다수의 후보자 가운데서 객관적인 판단을 통해 선택하려는 생각을 아예 가로막는 혈연적 편애이다. 흔히 목사들은 자기 아들이 신학교를 입학하는 순간부터 그 장래를 꿈꾸기 마련이다. 부모들은 자기 아들이 훌륭한 목사가 되기 원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문제는 훌륭한 목사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은 자기 아들이 훌륭한 인격과 목회자적 역량을 구비하여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주님의 부름을 따라 순종하며 헌신하는 목사가 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나 부모의 단순한 사랑과 욕심이 작용하면 훌륭한 목사의 개념이 세속화한다. 자기 아들이 고생스러운 오지선교사나 적은 교회 목사가 되기 보다는 큰 교회목사나 유명한 신학교수가 되기 원한다. 그것을 인간의 상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타락한 인간의 욕심이다. 따라서, 자신이 큰 교회목사인 경우, 그리고 은퇴시 아들이 적절한 연령인 경우 후계를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한번 그런 마음이 굳어지면 교회앞에 아들을 조심스럽게 선보이며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는 적지 않은 유혹과 범죄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목회를 하다가 유학을 떠나게 된 한 목사가 경험한 일을 알고 있다. 그가 어느날 노회 임원의 소개로 한 목사를 만났는데, 그는 1억대의 현금을 줄테니 후임자로 지원해 달라고 청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려고 집과 재산을 정리하여 그 돈을 만들었는데, 개척을 하자니 힘들고 고생스럽지만, 안정된 기성교회로 들어가면 사택도 주고 차도 주고 모든 생활비와 경비가 지급되니 좋고, 당신도 유학경비가 필요하니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 놀랐다. 말로만 들었던 성직매매가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그가 담임한 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중형교회였는데, 하물며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고생스러운 목회자의 길을 갈 수도 있는 한 목사에게 고급주택과 고급차, 충족한 수입과 안정된 생활, 대형 사무실과 서재, 수많은 부하직원들과 비서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액의 재정과 다양한 결정권, 그리고 수많은 교인들의 존경과 사회적 위상, 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주어지는데, 누가 그것을 가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것을 누려왔던 아버지가 남보다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아무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실로, 목회세습은 교회에 대한 애착과 아들에 대한 애착이 합쳐질 때 강행되는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이 세습되었으며, 다윗의 왕직도 세습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혈족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죄되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은 육적 후손이 아니라 영적 후손임을 바울이 분명히 하였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 측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혈족의 의미를 무시하였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혈족주의적 사고를 버리도록 명령하였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따라서, 교회는 철저히 혈족주의를 부정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영적 가족의식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되었다. 감독이나 집사와 같은 직책은 철저히 자격중심으로, 특히 덕망을 갖춘 인물로 선정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혈족적 세습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카톨릭교회의 시대에는 독신이 의무화되어 세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였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에서도 목회세습이 바람직한 후계형태로 추천된 적이 없다. 특히, 현대로 접어들면서 소수의 예외적 세습이 발생하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이 가장 후계의 적임자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혈족주의적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셋째로, 목회세습은 불공정한 선발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교역자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큰교회에는 목회지가 없어 떠도는 목사들이 수십명 혹은 그 이상이 출석하고 있는 실정이다. 큰 교회에서 전도사 한명만 구해도 수십명씩이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을 보인다. 하물며, 수천, 수만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경우 목회자를 공개모집하면 자천 타천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사들이 지원하며, 그중 상당수는 학력과 경력에 있어서 출중한 사람들이다. 과연 광림교회가 공개모집을 하였는지,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지원하였는지 궁금하다. 자격을 갖춘 목사들이 많이 지원하지 않았다면, 왜 그랬을까? 과연 아무 내정 없이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며 감리교 전체에서 널리 후임자를 찾았는가? 그리고, 과연 어떤 기준으로 수많은 지원자중에서 아들이 선정되었는지 알고 싶다. 형식적 절차를 거쳤다는 것만으로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물론이려니와 그 아버지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선발절차가 완전히 공정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교단 전체의 중대관심사인 광림교회 후임자로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이 교단 내에 퍼지면서 적임자들이 지원을 아예 포기하였다면, 그것은 더욱더 불공정하다. 사실이야 어떠하든, 목회세습은 아버지의 지지 하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적극적인 설득이든 소극적인 무언의 묵인이든 강력한 전임자 아버지의 직간접적 영향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일종의 부정선거에 해당한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작용하는 아들에 대한 애착과 선입견이 판단력을 오도하고 모든 절차를 불공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판단을 흐리게할 수 있는 요인을 거부하라고 경고하셨다: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예수님도 공의로운 판단을 명령하셨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성경은 항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가지고 판단할 때 공의로운 결정에 도달한다고 충고한다. 아들과 경쟁하게된 지원자들은 불리한 입장에 있는 정치적 약자들이다. 아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들을 충분히 그리고 공의롭게 배려할 수 없다.
 
교회법에는 후임자 후보자격기준에 아들을 배제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법정신을 고려해볼 때, 그것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법문은 모든 것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법정신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감리교목사의 자격에 "음주, 흡연을 하지 않는 이"라는 규정은 있어도 "마약을 하지 않는 이"라는 규정은 없다. 그렇다고 하여, 마약중독자를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건전한 인격과 덕의의 품성"속에 함축되어 있다. 목회세습 금지조항은 없으나, 그것은 전술한 규정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정당한 지식"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장로교 헌법에는 후임자 청빙에 있어서 교인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할지라도 "소수가 심히 반대하는 경우"에는 강행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연한 함축적 의미를 거스리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합법성을 주장하게 되면, 교회는 법정신에 따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하게 된다. 세습금지도 그동안에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양식에 맡겨두었으나, 이제 공론화하고 명문화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넷째로, 목회세습은 혈연승계의 약점을 간과하고 있다. 과거 전제적인 왕권에서는 세습이 무비판적으로 시행되어 왔으나, 문제점이 심각하였다. 인품이나 역량에 있어서 세자를 능가하는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왕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는 공정한 경쟁과 다각적인 분석을 거쳐 대통령을 선출한다. 혈연승계는 비록 형식적인 경쟁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사실상 내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적의 후계자를 선택했다고 볼 수 없다. 혈연이나 학연, 지연과 같은 연고인사의 경우가 모두 그러하다. 만일 대통령이 연고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면 그보다 더 뛰어난 역량과 인품을 갖춘 사람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연고인사는 그 공동체의 이익에 위배되며 미래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혈연승계는 그 본질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담임목사로서 대등성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부자의 경우에는 당사자나 교인들에게 있어서 대등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다른 후임자같이 거리를 두고 대하지 않게 된다. 한편, 아들의 입장에서도 항상 아버지와 연관하여 보는 교인들의 인식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교인의 삼각관계가 모두 비정상화된다. 이러한 삼각관계는 새로운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 목양관계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게 되는데, 이는 목회세습으로 야기된 불필요한 난관으로서 정상적인 성공적 교체를 어렵게 만들며 문제를 장기화한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보호와 인도아래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간섭으로 생각되면서 아들은 독자적 지도력과 목회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느끼고 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결국 부자간의 갈등을 결과하며, 이를 감지하는 교인들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교인들도 처음에는 카리스마적 공로자인 아버지의 설득력과 호감 때문에 아들을 수용하고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환상에서 깨어나 실체를 보면서 실망하기 쉽다. 물론, 아들이 아닌 후임자도 성공적이지 못할 수 있으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연관하여 걸었던 기대의 환멸과는 다르다.
 
기업을 대물림하는 사업가들의 경우에도 모두 희망적인 생각에서 세습하지만, 다수의 2세들이 실패에 이른다. 아버지의 지도력으로 성공한 회사라고 하여 그와 닮은 아들의 지도력이 계속적인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며 혈연승계의 약점을 간과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종류의 혈연승계를 비판하고 전문경영인의 도입을 주장한다. 아버지의 단순한 자식사랑과 애착이 자식의 장래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아버지와 무관한 교회에 부임하여 독자적으로 소신있게 목회하면 존경받는 성공적 목회자가 될 수도 있을 아들을 힘든 상황에 불러들여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결국 쓰러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 목회세습은 사회와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받는 목회세습 자체는 죄가 아니다. 죄악적 요소가 있다면, 그 과정에 개재될 수 있는 욕심과 애착, 그리고 그로 인한 불공정성과 같은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비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야되는 일과 상황에 따라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일이 있다. 나는 목회세습이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불가피한 경우나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목회세습이 가능하다. 그러나, 수많은 후보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반드시 목회세습을 강행할 필요는 없다. 바울 사도는 우상의 제물문제를 논하면서, 무엇보다도 덕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이 문제의 가부가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느니라."(고전 8.8) 그런 문제라면, 덕을 세우는 방향이 선택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가 양보하는 덕스러운 길을 택하였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13) 사실 상당한 인품과 역량을 갖춘 목사라면 누가 후임자로 선정되어도 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물론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아들이 후임자가 되면 교회가 계속 성장하고, 다른 목사가 되면 교회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가 세습을 정죄하고 있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그로 인해 실망하고 분노하는 현실에서, 그리고 상당수의 교인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한번 결정되었다 하여 목회세습을 강행하는 것이 덕스러운 행위인가? 설령 그것이 올바르고 정당한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재고해야 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있다. 그것은 전도대상인 대중들의 마음속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교리와 정통을 강조하며 분열과 대립을 정당화하고 사랑과 포용의 윤리를 실천하지 못하였으며, 성장과 능력을 내세우며 덕을 상실하였다. 불신자보다 윤리적으로 나을 것이 없는 주위의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사랑과 덕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아온 김선도목사와 광림교회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앞에 본을 보여 덕을 세우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리하여, 목회세습을 꿈꾸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 나는 이 어려운 결단을 위해 기도하며, 인간의 자존심 때문에 주님의 명예가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와 대응방안 - 공동포럼
주최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복음과 상황
일시 : 2000년 9월 5일(화) 오후 7시
장소 : 여전도회관 2층 루이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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